창조와 향기의 만남 (The Intersection of Creativity and Fragrance)


향기를 주제로 한 창작물과 

집에서 실행할 수 있는 

향기로운 DIY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Creative

비오베 정원에서 피어난 향기로운 인연

프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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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베 정원의 향기

1화. 정원 입구

나는 한 손에 여행 가방 손잡이를 쥔 채 천천히 정문을 통과했다. 프랑스 망통(Menton)의 비오베 정원(Jardin Biovès) – 이름만으로도 오랫동안 동경해 온 그 곳에 내가 서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나를 이끈 것은 작은 유리병 속 디퓨저의 향기로운 기억이었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상쾌한 풀 내음과 은은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내게 밀려왔다. 가슴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함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뜨니, 눈앞으로 분수대 하나가 보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고, 그 주위로 다양한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분수대 쪽으로 옮겼다. 여행길의 피로가 물안개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분수 가장자리에는 벌써 몇몇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중 한 남성이 분수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려고 애쓰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2화. 분수대

그러자 그가 다가와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그가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놀랐지만 이내 고마운 마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아, 네, 그러시면 감사하죠."

그는 내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몇 발짝 물러서서 앵글을 잡았다. 나는 분수대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서 보였다. 지나는 바람결에 레몬나무 잎사귀 향긋한 내음이 섞여 들었다. '그래, 이 향이야...' 마음 속으로 속삭이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찰칵. 그가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다.

"여기요." 그는 미소를 띤 채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한번 확인해보세요."

화면을 보니 분수대의 반짝임과 함께 내 모습이 환하게 담겨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긴 여행 끝에 마침내 꿈꾸던 정원에 선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말 잘 나왔네요. 감사합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분수대를 가리켰다.

"분수가 참 예쁘죠? 저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했다.

"네, 분수 물소리가 참 시원해요." 내 말에 그는 동의하듯 살짝 눈을 좁히며 분수를 바라보았다. 시원한 물줄기가 햇빛에 부서지며 무지갯빛 물보라를 일으켰다.

잠시 말없이 분수를 함께 바라보았다. 주변의 꽃들과 푸른 나무들, 그리고 공기 중에 희미하게 감도는 시트러스 향. 문득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순간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자 여행 오신 거예요?"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자... 그냥 잠시 떠나고 싶어서요." 굳이 자세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럼 제가 이 정원 좀 같이 둘러봐드릴까요? 마침 저도 혼자 산책 중이었거든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낯선 사람과 함께 돌아다니는 일이 조심스러워 망설여졌지만, 이국의 정원에서 마주친 그의 친절한 눈빛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그러세요. 함께 걸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나는 용기를 내어 답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란히 분수대를 뒤로 하고 정원 깊숙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앞쪽으로 노란 레몬 조형물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3화. 레몬 조형물

조금 더 걸으니 커다랗고 환한 레몬 조형물이 나타났다. 잘 익은 레몬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주변에는 실제 레몬과 오렌지로 꾸민 작은 장식들도 놓여 있어 정원이 마치 동화 속 축제 현장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와... 정말 귀엽네요."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준호도 미소 지었다. "망통은 레몬 축제로 유명하거든요. 해마다 이 정원에서 레몬 페스티벌을 열어서 이렇게 레몬과 오렌지로 만든 조형물을 전시해요."

"아, 저도 들은 적 있어요!" 내가 반색했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 훨씬 예쁘네요. 향기도 나는 것 같아요." 나는 코를 살짝 벌름거리며 주변 공기를 맡아보았다. 실제 레몬 향이 나는 건지 내 상상이 만들어낸 건지 모를 상큼함이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그가 장난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쩌면 진짜 레몬 향이 어딘가에서 풍겨올지도 몰라요. 망통 레몬은 향이 진하기로 유명하니까요."

나는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조형물 앞에는 레몬 모양 화분과 작은 레몬나무들도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작은 레몬나무 잎을 손끝으로 살짝 문질렀다. 그러자 손끝에 상큼한 향이 배어 나왔다. 코앞에 가져가 맡아보니 톡 쏘는 레몬 향에 기분이 절로 밝아졌다.

"정말 향기가 좋아요." 내가 행복한 탄성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게요." 그도 고개를 숙여 나와 함께 잎사귀 향을 맡았다. "상쾌하네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조금은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이 남자에게는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사실 제가 여기 온 건... 향기 때문이었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그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향기요?"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서 쓰던 디퓨저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나던 향이 너무 좋아서요. 유칼립투스, 레몬머틀, 재스민... 그리고 머스크와 베티버 같은 향들이 섞인 향이었는데, 그 향을 맡으면 머릿속에 마치 이런 정원이 떠올랐거든요.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는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그래서 그 향의 정체를 찾아온 거군요. 그 향기가 바로 이 망통의 정원을 떠올리게 했나 봐요."

"그런 셈이죠." 내가 주변의 레몬 조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엔 그냥 공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잊히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충동적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어요. 바보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 바보같지 않은데요. 멋진걸요." 의외의 대답에 나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진심이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마음에 남는 무언가를 직접 찾아 나섰다는 게 용기 있다고 생각해요."

그 따뜻한 말에 내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쑥스러워 시선을 레몬 조형물로 다시 돌렸다. "그냥...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그 향의 정원이 실제로 존재할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이 그 기억과 겹쳐지네요?"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빛 레몬 조형물, 녹음 짙은 나무들, 상큼한 향기…. "네, 꿈같아요. 상상하던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에요."

"현실이 꿈만 같을 때가 있죠." 그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저도 오늘 그냥 충동적으로 이곳에 나왔거든요. 그러다 이렇게 향기를 따라온 분을 만나게 되었네요."

우리 둘은 눈을 마주보고 살짝 웃었다. 알록달록한 정원 풍경 속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자연스러웠다.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와 우리 주위를 감싸며 지나갔다. 그 바람에는 어디선가 나는 듯한 은은한 꽃내음이 실려 있었다.

"저쪽 길을 따라가 볼까요?" 그가 앞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가리켰다. 길가에는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푸른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기대에 찬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4화. 유칼립투스 나무길

조금 더 걸으니 제법 키가 큰 나무들이 나타났다. 잎사귀가 길쭉하고 은빛을 띠는 독특한 나무들이었다. 우리는 그 그늘 아래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공기가 한층 시원해진 듯했다.

"이 나무들 참 크네요." 내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종려나무는 아닌 것 같고… 무슨 나무일까요?"

그가 한 나무 기둥 옆에 세워진 작은 팻말을 가리켰다. "여기 이름이 적혀 있네요. 유칼립투스라고 써있어요."

"유칼립투스요?"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호주에 있는 그 유칼립투스요?"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 것 같아요. 망통은 기후가 좋아서 이런 이국적인 나무들도 잘 자란대요."

나는 신기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나무 줄기를 손으로 가만히 만져보았다. "정말 의외예요... 유칼립투스라니."

그러고는 손바닥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살짝 씁쓸하면서도 상쾌한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향기도 나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도 나뭇잎 하나를 손에 따서 비비고는 코에 가져갔다. "오, 그렇네요. 약간 시원한 향이 있어요."

"감기 걸렸을 때 맡는 멘톨 같기도 하고요." 내가 웃으며 덧붙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유칼립투스 오일을 물에 몇 방울 떨어뜨려서 방에 향을 피워 주셨었거든요. 코 막힐 때 도움이 된다고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 향, 참 익숙한 느낌이네요. 이렇게 살아있는 나무에서 직접 향을 맡아본 건 처음이지만."

우리는 나란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자 회색빛이 도는 잎들이 살랑거리며 서로 스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속삭임처럼 들렸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 사이로 파란 하늘이 조각조각 비쳐 보였다.

"이 나무들도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왔네요." 내가 조용히 말했다. "저처럼요."

그가 내 말을 곱씹으며 되물었다. "고향을 떠나, 라고 하셨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먼 길을 여행해 왔으니까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서울이세요?" 그가 약간 놀란 얼굴로 웃었다. "저도 한국에서 왔는데... 세상 참 좁네요. 여기서 한국분을 만나다니."

예상치 못한 공통점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 만났다는 생각에 그저 어색함을 잊고 있었다.

"한국 분이셨군요." 내가 미소 지었다. "그러면 저를 위해 통역해주고 계셨던 건 아니었네요?"

"네, 그냥 한국어로 말씀 드린 건데, 덕분에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네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작은 발견은 우리를 더 가깝게 느끼게 해 주었다.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 한국에서 온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향기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니, 묘한 인연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가 잠시 머뭇이다 말을 이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민지예요. 한민지."

"저는 준호입니다." 그도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제 보니 서로 말 놓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민지씨?"

나는 그의 제안에 살짝 당황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럴까요? 여행 와서 처음 만난 사람하고 이렇게 말 놓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싫으시면 그냥 편하게 계속 말씀하셔도 돼요." 준호씨—아니, 준호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준호... 오빠? 혹시 연세가...?"

"저 서른이에요." 그가 웃었다. "오빠라고 부르셔도 되겠네요. 민지 씨는요?"

"저는 스물여덟이에요."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오빠보다는 제가 좀 어리네요."

"그럼 편하게 말을 놓을게." 준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응, 나도 편하게 말해볼게."

우리는 그렇게 말을 트고 나니 한층 자유로운 기분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어의 거리감이 사라지자, 우리 사이의 분위기는 더 부드럽고 친밀해진 듯했다. 유칼립투스 향이 코끝을 맴돌고, 어딘가 멀리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의 정원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5화. 벤치와 아이리스

한참을 걷다 보니 작은 벤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나무 벤치였다. 적당히 걸은 우리는 잠시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다.

"여기 정말 예쁘네요." 내가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길가에는 갖가지 꽃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특히 보랏빛 아이리스 꽃들이 눈길을 끌었다.

준호도 숨을 고르며 미소 지었다. "그러게. 이렇게 조용한데 도심 한가운데라니 신기해."

나는 옆에 핀 아이리스 몇 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운 보랏빛 꽃잎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꽃... 아이리스 맞지? 붓꽃이라고도 부르는."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이리스. 아마 맞을 거야. 예쁘네."

"꽃말이 '좋은 소식'이래." 내가 살며시 말했다. "어디서 읽은 적 있어. 보라색 아이리스는 비 온 뒤 무지개처럼 기쁜 소식이라는 뜻도 있고."

"좋은 소식..." 준호가 그 말을 되뇌었다. "민지에게 오늘 좋은 소식이 있었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 웃었다. "글쎄,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냥 이렇게 여행 와서 좋은 사람을 만난 게 좋은 소식일지도."

그는 살짝 놀란 듯 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는 벌써 좋은 소식인데."

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지만 싫지 않은 어색함이었다. 나는 꽃잎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말을 이었다. "참, 아이리스가 프랑스의 국화라는 거 알아? 프랑스 왕가 문장에도 아이리스가 그려져 있다고 하더라."

"아, 플뢰르 드 리스?" 준호가 바로 알아차렸다. "그게 아이리스를 형상화한 거래지. 역시 많이 알고 있네."

"오기 전에 이것저것 찾아봤거든." 내가 멋쩍게 웃었다. "여행지 공부 좀 했지."

"디퓨저 향기 따라 왔다더니, 막상 오기 전엔 자료 조사를 많이 했나 봐?"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향기에 이끌려 오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 오는 곳인데 아무 정보 없이 오긴 좀 그래서. 망통이 '레몬의 도시'라고 불리는 것도 알게 됐고, 정원 많은 것도 알았어. 근데 이렇게 직접 와 보니까 자료로 본 것보다 느낌이 훨씬 다르다."

"좋은 쪽으로 다르지?" 그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응, 훨씬 좋지! 사진으로는 향기를 못 느끼잖아."

"맞아, 향기는 직접 맡아봐야 알 수 있지." 준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여기 앉아 있으니까 여러 가지 냄새가 섞여 오네. 꽃향기도 나고, 풀냄새도 나고..."

"거기에..." 내가 장난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아이스크림 냄새도 나는 것 같은데?"

정말로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스크림 파는 소형 트럭이 서 있었고, 달콤한 바닐라 향이 희미하게 풍겨왔다. 준호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더니 웃었다. "그러네. 갑자기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그러게. 나도." 내가 킥킥 웃었다. "조금만 더 쉬었다가 아이스크림 사러 갈래?"

"좋아." 준호는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시 두 사람 다 말없이 정원을 느끼며 쉬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군데군데 땅 위에 반짝이고, 멀리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 나는 가만히 준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편안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가슴 한 구석이 두근거렸다. 우리가 방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좋은 사람을 만난 게 좋은 소식일지도.' 내가 했던 말이 자꾸 되뇌어졌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긴 여행 동안 느꼈던 외로움이 이 짧은 시간 사이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갈까?" 준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도 얼른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 일순 심장이 또 한 번 두근거렸다.

우리는 함께 아이스크림 트럭으로 걸어갔다. 둘 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다시 천천히 정원 길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의 차가운 단맛이 혀끝에서 사르르 녹았다.

"역시 더울 땐 아이스크림이 최고야." 내가 행복한 목소리로 말하자,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은 향기에 맛있는 것까지, 오길 잘했네 우리." 그의 말투에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친근함이 묻어났다.

우리는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해가 많이 기울어가며 공기가 조금씩 선선해지고 있었다. 저쪽 길가 담장을 타고 하얀 꽃송이들이 피어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녁 햇살 아래 유난히 그 흰 꽃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더 먹으며 말했다. "저기 흰 꽃 보여? 되게 예쁘다."

준호가 눈길을 따라갔다. "응, 예쁜데... jasmine인가? 재스민 비슷해 보여."

"재스민?"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가보자."

6화. 자스민의 저녁

우리는 담장 가까이 다가갔다. 담 위로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송이들, 가까이서 보니 잎 모양이나 꽃 모양이 분명 자스민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꽃향기를 맡았다.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아직 피어있는 꽃보다 시든 꽃들이 더 많았지만, 남아 있는 향기는 부드럽게 퍼지고 있었다.

"역시 재스민이네."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향 좋다..."

준호도 가까이 다가와 함께 향을 맡았다. "응. 낮에는 향이 약한데, 해 지고 선선해지니까 슬슬 향기가 나는 것 같아."

"맞아, 재스민은 밤에 더 향기가 진하다고 들었어." 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낮에는 평범해 보이다가 밤에 진가를 드러내는 사람을 재스민에 비유하기도 한대."

"시적인데?" 준호가 미소 지었다. "민지도 그런가? 낮보다 밤에 더 매력적인 사람?"

나는 피식 웃었다. "에이, 난 낮에도 밤에도 그게 그거일걸."

"아니야, 꽤 매력 있는데." 그가 장난기 반, 진심 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장난인 줄 알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재스민 차 좋아해?" 나는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응, 좋아해. 향이 진해서 밤에 마시면 기분이 차분해지더라고." 준호도 담장에 손을 대며 꽃을 바라보았다. "재스민 향을 맡으면 어떤 생각 들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음... 포근한 여름밤? 별이 되게 많고,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 맞으면서 누워 있는 그런 상상."

"로맨틱한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옛날 집 앞 마당이 떠올라. 어릴 때 살던 집 근처에 재스민 덩굴이 있었거든. 한여름 밤 창문 열어 놓으면 그 향이 들어왔어. 그 냄새 맡으며 자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지."

"그랬구나." 나는 처음 듣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의 조각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어쩐지 재스민 향엔 편안함이 있어."

"응. 그래서 요즘도 스트레스 받으면 재스민 차를 마시곤 해." 준호가 나를 바라보았다. "민지는 어때? 특별히 좋아하는 향 있어?"

"나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를 휴지에 싸서 버리며 말했다. "사실 아까 말했던 디퓨저 향기가 정말 특별했어. 여러 가지 향이 섞였는데, 특히 재스민 향도 들어 있어서 그랬나 봐. 낮에 기분 좋게 해주는 레몬이나 유칼립투스 같은 향도 좋지만, 결국 내 마음을 끌어당긴 건 재스민처럼 포근하고 머스크나 베티버처럼 잔잔하게 오래가는 향들이었던 것 같아."

준호는 가만히 내 말을 들었다. "아까 여러 가지 향이 섞여 있었다고 했지... 유칼립투스, 레몬머틀, 재스민, 아이리스, 머스크, 베티버..."

"우와, 잘 기억하네?" 내가 놀라자, 그가 웃었다.

"기억력 좋다니까. 근데 향들을 쭉 들어보니까 꼭 향수의 노트들 같다. 톱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 그런 거 있잖아."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래서 좋아했나 봐. 처음에는 상큼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포근하고 그윽해지니까."

"마치..." 준호가 잠시 말을 망설였다.

"마치 뭐?" 내가 재촉하자 그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마치 우리 오늘 하루 보낸 것 같아서."

그 말에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침의 상큼함, 한낮의 생기, 그리고 저무는 지금의 온화함까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그러했다.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나는 용기를 내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처음엔 그냥 시원하고 상큼하게 인사 나누고, 지금은 이렇게 포근하게 얘기하고 있네."

준호는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시간 참 빨리 간다. 벌써 해가 저만치 내려왔어."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정원에는 긴 저녁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나뭇잎들도 차분한 색으로 변하고, 잔잔한 공기 속에 새소리도 한층 잦아들었다.

"우리 저쪽도 걸어볼까?" 그가 먼쪽을 가리켰다. "아직 끝까지 다 안 둘러봤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제 곧 해 질 테니 정원 끝 전망대에서 노을 보면 예쁠 것 같아."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자스민 꽃 향기가 우리 뒤를 오래도록 따라왔다.

7화. 해질녘 산책로

정원 끝쪽을 향해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하늘은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고, 따스했던 공기는 서서히 선선한 바람으로 바뀌어갔다. 곳곳에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며 은은한 불빛이 길을 밝혔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가 잔디에는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리고 있었다. 분수에서 흩날리던 물보라와는 또 다른 촉촉한 물안개가 공중에 퍼졌다. 바닥에 물이 젖으며 촉촉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앗, 조심해!" 준호가 갑자기 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내가 물뿌리를 지나치려는 순간, 스프링클러 분사가 살짝 옆으로 번져 우리 쪽으로 물이 뿌려졌던 것이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는 반대쪽으로 몇 걸음 뛰어나왔다.

우리 둘 다 약간 젖은 어깨를 털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깜짝 놀랐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시원해졌어."

"미안, 더 젖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준호도 웃었다. 그는 아직 내 팔을 잡은 채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우리 둘은 그제서야 손을 살짝 놓았지만, 방금까지 이어진 촉감이 아쉬운 듯 팔에 온기가 남았다.

"근데 비슷하지 않아?" 내가 젖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뭐가?" 그가 물었다.

"방금 흙냄새. 비 온 뒤에 나는 흙냄새 있잖아." 나는 촉촉한 흙내음을 음미하며 말했다. "이거... 약간 베티버 향 같기도 하고."

"베티버?" 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향수 원료로 쓰이는 풀인데, 흙냄새랑 비슷한 깊은 향이 있거든." 내가 설명했다. "흔히 대지의 향이라고 불러."

"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향기에 대해서 정말 잘 아는구나. 난 베티버라는 건 처음 들어봐."

"그냥, 좋아해서 조금씩 알아본 정도야."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방금 물 뿌려지고 나서 확 풍기는 이 냄새를 꼭 맡아보고 싶었어. 서울에서는 흙냄새 맡기가 쉽지 않거든."

"맞아, 도시에서는 비 오면 빗물 냄새만 나고 이런 흙냄새는 잘 못 맡지." 준호가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좋다. 촉촉하고 차분해지는 느낌?"

"응. 이상하게 안정되는 냄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은 좀 웃겼지만."

우리 둘은 스프링클러를 피해 걸음을 계속했다. 웃음이 잦아든 후에도 한동안 미묘한 미소가 입가에 남아 있었다. 방금 잠깐이었지만 서로를 잡아끌던 순간의 설렘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내 심장은 아직도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추워? 옷 좀 젖었는데." 준호가 내가 소매를 살펴보는 것을 보고 물었다.

"괜찮아. 금방 마를 거 같아." 내가 고개를 저었다. "금방 뛰어나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나중에 감기 기운 대신 멋진 향기만 얻을 뻔했네." 그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감기 기운 대신 멋진 향기라..." 나는 그 말이 재미있어서 중얼거리듯 따라 말했다. "응, 그럴 바엔 백 번 젖는 게 낫지."

준호가 빙그레 웃으며 내쪽을 보았다. "정말 향기를 좋아하는구나, 민지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나는 솔직히 말했다. "향기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오늘 하루 종일 계속 향 얘기만 한 것 같아,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잖아? 평소에 이렇게 향기 하나하나 맡아보면서 걷기 힘든데." 그는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끼며 기지개를 켰다. "나 오늘 새로운 경험 많이 하는 중이야."

"나도야."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렇게 천천히, 풍경이랑 향을 음미하면서 누군가랑 걸어본 게 언제였나 싶어."

"누군가랑...?" 준호가 그 말에 살짝 반문했다. 나는 내가 무심코 꺼낸 말의 뉘앙스를 깨닫고 부연했다.

"아, 그냥... 혼자 지낸 시간이 꽤 됐거든. 바쁘게 살다보니까 누군가랑 여유롭게 대화하며 산책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

"그랬구나." 그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나도 비슷해. 그래서 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져."

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우리 둘 다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조금은 쓸쓸했다. 곧 이 시간이 끝나버릴 것을 알기 때문일까.

조금 더 걷자 앞쪽으로 울창한 오렌지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황색 열매들이 여기저기 달린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짓하며 말했다. "오렌지 나무다! 아직 열매가 많이 남아 있네?"

준호가 웃었다. "망통 오렌지나무는 결혼식 하객보다 많다더니, 진짜 많긴 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웃으며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하는 말."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오렌지 나무들을 향해 다가갔다.

8화. 오렌지 나무 그늘

정원 한켠에 자리 잡은 큰 오렌지 나무 아래에 우리는 섰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오렌지들 사이로 저녁 노을 빛이 비집고 들어와 반짝였다. 마치 나무에 주황색 등이 켜진 듯했다. 주변에는 이미 떨어진 오렌지들도 몇 개 보였다.

나는 나뭇가지에 손을 뻗었다. 닿지는 않았지만, 손끝으로 열매 하나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혹시 이걸 따 먹으면 불법일까?"

준호가 피식 웃었다. "걸리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네. 공원에 열린 과일이라."

"역시 관광객은 안 될까." 내가 손을 내리며 웃었다. "대신 이거라도..." 땅에 떨어져 있는 오렌지 하나를 주워 들었다. "이건 땅에 떨어진 거니까 괜찮겠지?"

"그렇지 않을까?" 준호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았다. 나는 주운 오렌지의 껍질을 손톱으로 살짝 긁어 보았다. 그러자 톡 쏘는 상큼한 향유가 튀어나와 손끝이 진한 귤향으로 가득 찼다.

"와, 향 좋다!" 내가 환하게 외쳤다. 손끝을 코에 대고 깊게 맡자 짙은 오렌지 향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상쾌했다. "정말 상큼해."

준호도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손끝을 내밀었다. "한번 맡아봐."

그가 내 손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와 향기를 함께 맡았다. "진짜네... 완전 신선한 오렌지 향."

"그치?" 나는 괜히 뿌듯해서 오렌지를 들어 보였다. "자연이 준 향수 같아."

"민지가 오늘 찾던 향이 바로 이거 아니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망통의 과일 향."

나는 가만히 오렌지를 내려다보았다. "글쎄... 이 향도 퍼즐 조각 중 하나였겠지. 오늘 맡은 여러 향들이 다 모이면 비로소 완전체가 될 것 같아."

"퍼즐 조각이라..." 준호가 그 말을 되뇌었다. "그 퍼즐이 다 맞춰지면 어떤 그림이 완성될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음... 아마도 아주 행복한 사람 한 명?"

내 대답에 준호가 날 바라보았다. "행복한 사람?"

나는 부끄러워지려 해 얼른 말을 이었다. "응, 그러니까... 오감이 다 만족스러운 상태로 웃고 있는 내 모습 같은 거랄까."

"그 사람 혼자 있어?" 그가 살짝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눈을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니... 옆에 누가 하나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준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누군데? 어떤 사람이 옆에 있는데?"

나는 손에 든 오렌지를 굴리듯 만지작거리며 작게 웃었다. "글쎄... 누구일까."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마음이 통하는 듯했다. 따스한 기운이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나무 너머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귤향 가득한 손끝을 코에서 떼지 못한 채,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며 이 순간을 마음에 새겼다.

멀리서 정원의 스피커에서인지,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을 지는 정원에 어울리는 느린 프랑스 샹송 같았다.

"저기 좀 봐." 준호가 위쪽을 가리켰다. "새들도 집에 가나 봐."

하늘을 보니 작은 새 몇 마리가 나란히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어깨가 내 어깨에 살짝 닿았다. 떨리기보다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기대어 서 있었다.

"거의 다 왔나봐." 그가 앞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기 끝이 전망대일 거야."

오렌지 나무 그늘에서 몇 걸음만 더 가면 정원 끝 가장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작은 계단과 난간이 보였다.

나는 손에 든 오렌지를 조심스레 다시 나무 밑에 내려놓았다. "이제 저기 가서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아봐야지."

"마지막 퍼즐 조각?"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응, 오늘 하루의 마지막 향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앞으로 걸었다. 준호도 천천히 내 옆에 발을 맞추었다.

9화. 정원 끝 전망대

계단을 올라 작은 전망대 겸 테라스에 섰다. 정원의 끝자락, 도심과 바다가 이어지는 경계였다. 저 멀리 지중해가 노을을 받아 주황빛 띠를 이루고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산자락 위에 옛 요새가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망통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말 아름답다."

"그렇지?" 준호도 난간에 기대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건 사진으로 남겨야지."

그는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나도 뒤따라 내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찍었다. 노을빛을 받은 구름이며 야자수들의 실루엣까지, 모든 것이 황홀했다.

"사진 찍어줄까?" 준호가 휴대폰을 든 내게 물었다.

"아... 응."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분수대 앞에서 사진 찍던 아침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나는 난간 옆에 서서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섰다. 준호가 카메라를 들자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해질녘의 부드러운 빛 속에서 마음이 편안했다.

찰칵. 몇 장 더 찰칵.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준호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제 끝인가요, 모델님?"

"네, 감사합니다." 나도 농담조로 응수했다. 우린 함께 웃었다.

사진을 함께 확인했다. 내가 바라본 노을, 그리고 내 옆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옆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얼굴. 그리고 그 옆으로 분홍빛 하늘. 사진 속 내 눈빛이 무척 평온해 보여서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표정이 아주 좋은데?" 준호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 보여?" 내가 슬쩍 그를 바라봤다.

"응. 되게 행복해 보여." 그의 말투는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응... 행복해."

그가 휴대전화를 받아 자신의 사진들도 넘겨보았다. "이거 봐봐. 여기 너랑 오렌지 나무 쪽에서 찍은 candid." 그는 아까 내가 오렌지 향을 맡고 있을 때 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가 손끝에 코를 묻고 눈을 감고 미소 짓는 옆모습이었다. 내 모습이 저렇게까지 편안해 보일 줄은 몰랐다.

"언제 찍었어, 이런 걸?" 내가 놀라며 물었다.

"너무 예뻐 보여서 몰래." 그가 웃었다. "나중에 보내줄게."

나는 사진 속 나를 한 번 더 보고는 부끄러워 핸드폰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 좋은 추억 많이 남겨주고."

"추억이라..." 그가 난간에 팔을 올려놓으며 나즈막히 말했다. "금방 옛날 일이 될까?"

그의 목소리에 담긴 아쉬움에 내 가슴도 덩달아 저려왔다. "그러게... 벌써 해가 지고 있네."

"민지는 내일 어디로 가?" 그가 불쑥 물었다.

나는 예상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내일... 원래 계획이라면 내일 오전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 쪽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정해둔 건 없어."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냥 즉흥 여행이라서, 발길 닿는 대로 다니려고 했거든."

"그래?" 그가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나도 그럴 생각인데."

우리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노을빛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한동안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말을 잇기 힘들었다.

"추워?" 그가 내 팔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이 끝나가는 해에 공기가 조금 싸늘해진 듯했다. "조금...?"

그러자 그가 재빨리 자신의 얇은 자켓을 벗어 내 어깨에 살포시 걸쳐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는데 감기 걸리면 안 되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준호 씨는... 아, 준호는? 괜찮아?"

"나는 원래 열이 많아서 괜찮아."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 입고 있어."

재킷에서 은은하게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희미한 향수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아마도 아침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머스크 향이 이제서야 남아 전해지는 듯했다. 하루 종일 함께 걸으며 이미 향들이 익숙해진 탓일까, 그의 옷깃에서 풍기는 그윽한 잔향이 나를 더욱 편안하게 했다.

"고마워." 나는 재킷을 꼭 여미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준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추억은 쉽게 옛날 일이 안 될 거야. 이렇게 강렬한 건 특히."

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붉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응, 나도 잊지 않을 거야. 오늘."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어." 그가 살며시 웃었다. "덕분에 내 기억 속 향기 노트들도 다 깨워진 기분이다."

"향기 노트요?" 내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민지 덕분에 나도 잊고 있던 유칼립투스 향기, 재스민 향기, 흙냄새, 이런 거 하나하나 다시 느꼈잖아. 그것들 다 내 기억 어딘가에는 있었는데 평소엔 생각 못 했거든."

"하긴, 우리 그냥 살 땐 이런 거 일일이 못 느끼지." 나도 공감했다. "나도 오늘 따라온 그 향들의 정체를 진짜 다 만난 것 같아."

"마지막 퍼즐 조각도 찾았어?" 준호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두 팔을 뻗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후— 찾은 것 같아. 바로 이 공기, 이 순간의 향기."

나의 말에 준호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내게로 몸을 돌렸다. "어떤 향기인데?"

나는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벅찬 마음을 담아 말해보려 했다. "음... 이제 막 하루가 저문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랄까. 따뜻했던 햇살과 차가워지는 밤공기가 섞여서 만들어내는 향. 그리고 우리가 남긴 오늘 하루의 기억들이 더해진 냄새."

준호는 눈을 깜빡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나도 맡아볼 수 있을까?"

"옆에 있으면 같이 맡는 거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느껴지지 않아? 바닷바람 냄새도 조금 나고, 꽃향기는 희미해졌지만 대신..."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그가 조용히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대신?"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의 얼굴이 코앞에 가까워졌다. 숨을 들이쉬자, 방금 전까지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그의 재킷에서 풍기는 포근한 향과 함께, 그의 존재 그 자체의 온기가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그의 심장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신, 서로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품 안으로 내가 조심스럽게 안겼다. 아니, 그가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감싸 안았다. 귓가에 그의 심장 소리가 고동쳤다. 그의 향기가 나를 감싸고, 나의 향기도 그에게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저 멀리 마지막 노을이 사라지고, 하나둘 밤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원의 불빛들이 아늑하게 발밑을 밝혔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완벽한 순간이었다.

10화. 향기의 여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둑해진 정원에 가로등 불빛이 우리 그림자를 부드럽게 드리웠다. 우리는 서로를 천천히 놓았다. 나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따뜻했다.

"저..."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젠 정말 닫을 시간인가 봐."

정원 입구 쪽으로 멀리 시선을 돌리자,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쪽에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안내 방송이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게." 준호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는데."

"괜찮아." 내가 용기를 내서 그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우린... 아직 시간 많잖아."

그 말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의 눈을 보았다. 이제 서로의 마음을 꽤나 알 것 같았다. 내일의 행선지를 묻던 그의 질문, 즉흥적이라던 우리의 여행 계획. 어쩌면 우리는 이미 같은 길을 향해 마음을 정한 건지도 몰랐다.

"배 안 고파?" 그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슬슬 허기지지 않아?"

출출함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의 떨림에 취해 있었는데, 그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조금?"

"마침 저쪽 길 건너에 맛있는 해산물 파스타 집이 있던데." 준호가 살짝 고개짓으로 정원 밖을 가리켰다. "같이 저녁 먹을래?"

나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응, 좋아!"

우리는 손을 잡고 정원 입구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낮에 걸어왔던 길들이 밤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조용한 나무들 사이를 비추는 등이 아늑했고, 꽃들은 보이지 않지만 향기의 기억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듯했다.

분수대 옆을 지나칠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분수는 여전히 졸졸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침에 그 분수 앞에서 사진을 찍던 내가 떠올랐다. 그로부터 겨우 몇 시간 지났을 뿐인데, 모든 것이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왜?" 준호가 나를 따라 멈춰 섰다.

"그냥... 고마워서." 내가 작게 대답했다.

"뭐가?"

"이 정원. 그리고..." 나는 그의 손을 살짝 더 꼭 쥐었다. "준호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분수대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하듯 끄덕이며 웃었다. "나도 고마워."

다시 발걸음을 뗐다. 정원 입구의 문이 보였다. 밤공기가 차지만 맑았다. 코끝에 맴도는 오늘의 향기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디퓨저의 향기를 따라 찾아온 여행에서, 난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기억의 향기를 얻었구나.'

문을 나서기 직전, 나는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레몬과 꽃, 나무와 흙, 그리고 사랑의 기운이 한데 어우러진 망통의 밤공기가 온전히 나를 채웠다. 이 향기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정원 밖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나는 옆에 있는 준호를 향해 활짝 웃었다. "가요, 우리."

"응." 그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자."

우리는 함께 정원을 떠나 밤거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비오베 정원에서 피어난 향기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 영원히 향기로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