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향기의 만남 (The Intersection of Creativity and Fragrance)


향기를 주제로 한 창작물과 

집에서 실행할 수 있는 

향기로운 DIY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Creative

웹소설[메종 프라랑-천년의향-시즌1] 사라진 이름은 향으로 돌아온다.

프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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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프라랑


천년의 향


사라진 이름은 향으로 돌아온다.

현대 로맨스 · 향 판타지 · 역사 미스터리


웹소설 시즌 1 완결 — 프롤로그 + 12화

제목: 현대의 프라랑과 도경, 천 년 전 인물과 향의 기억이 달빛 아래 겹치는 대표 삽화 - 설명: 현대의 프라랑과 도경, 천 년 전 인물과 향의 기억이 달빛 아래 겹치는 대표 삽화


목차


프롤로그. 천년 전, 서라벌의 밤

1화. 황리단길에 무슨 향이 나요

2화. 향기 전쟁

3화. 강제 콜라보

4화. 달빛 아래 대릉원

5화. 파리에서 온 남자

6화. 잃어버린 원료

7화. 지베르니의 정원

8화. 파리의 밤, 서라벌의 밤

9화. 라뮤의 제안

10화. 향이 지워진 날

11화. 천년의 레시피

12화. 굴 서라, 서라벌의 꽃


제목: 시즌 1 주요 등장인물 얼굴과 검은 고양이 침향이의 캐릭터 안내 - 설명: 시즌 1 주요 등장인물 얼굴과 검은 고양이 침향이의 캐릭터 안내


프롤로그. 천년 전, 서라벌의 밤


제목: 천 년 전 프라랑 공주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 설명: 천 년 전 프라랑 공주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 천년 전, 서라벌


바다는 아직 어두웠다.

달이 진 뒤의 물은 먹을 풀어 놓은 듯 검었고, 부두 끝에 꽂힌 횃불 몇 자루가 겨우 제 발치만 밝히고 있었다. 지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왕실의 작은 포구. 세 척의 배가 떠날 채비를 마쳐 가고 있었다. 돛줄이 감기며 낮게 삐걱였고, 물통을 진 사내들의 숨이 그 사이를 오갔다. 소금기 밴 바람이 지날 때마다 횃불이 한 번씩 몸을 눕혔다.

부두 끝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서라벌 사람들이 꽃이라 부르던 왕녀, 프라랑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작은 비단 향낭을 감싸 쥐고 있었다. 손바닥을 반 넘게 채우는 크기, 청자색과 석류색 실을 섞어 짠 주머니였다. 오래 매만진 매듭이 손끝에서 반들반들 미끄러졌다.


제목: 칠 세기 왕실 포구에서 프라랑 공주가 무흔에게 향낭을 맡기는 새벽 - 설명: 칠 세기 왕실 포구에서 프라랑 공주가 무흔에게 향낭을 맡기는 새벽

곁에 선 소이가 향낭의 입을 마지막으로 여며 주었다. 궁에서 평생 향을 다뤄 온 손은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향입니다, 공주님."

"마지막이 아니라……."

프라랑은 향낭을 가슴께로 끌어올려 숨을 들이켰다. 먼저 가슴이 묵직해졌고, 그다음에 눈앞이 잠깐 환해졌다. 장미가 아래로 가라앉고, 유향이 가는 연기처럼 위로 올랐다. 침향이 그 사이에서 오래 견딘 나무의 숨을 천천히 쉬었고, 모과가 혀끝처럼 산뜻하게 깨졌고, 솔이 그 전부를 푸른 바늘로 붙들었다. 다섯이 한 송이가 되려다 말고, 매번 마지막 한 뼘에서 어긋났다.

아직, 미완이었다.

"남겨 둘 처음이에요."

소이가 고개를 숙였다. 주름진 눈가가 잠깐 떨렸다.

"완성해 드리지 못한 채 보내는 것이, 늙은 손의 한입니다."

"완성은." 프라랑이 향낭을 내려다보았다. "돌아와서 할 거예요. 이 땅의 재료로, 이 땅의 계절로."

멀리서 뱃사람들이 마지막 짐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는 어둠에 잠긴 서라벌 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궁의 지붕도, 자란 골목도 이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눈은 정확히 그 방향을 알고 있었다.

승선교 아래에 무흔이 서 있었다. 젊은 낭도는 시선을 낮추고 있었지만, 그 어깨가 활시위처럼 당겨져 있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프라랑이 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향낭을, 그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무흔의 손가락이 굳었다.

"공주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남아 줘."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남아서, 기억해 줘."

무흔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공주의 눈을 정면으로 보았다.

"지키라는 것이 향입니까, 약속입니까."

"둘은 같은 것이야."

향낭이 무흔의 손바닥에 온전히 얹혔다. 그 순간 솔의 푸른 기운만이 부두 쪽에 낮게 남고, 장미의 붉은 무게는 배 쪽으로 흘러갔다고—늙어 백발이 된 뒤에도 무흔은 그 밤을 그렇게 기억했다.

갑판 위의 아비틴은 밧줄 풀리는 소리를 등 뒤에 두고, 공주가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비어 있었다.

며칠 전까지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던 향낭이 없었다. 그 빈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비틴은 물으려다가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고향을 두고 가는 것이 두렵습니까."

공주가 그 손을 잡고 갑판에 올라섰다.

"두고 가는 것이 있어, 돌아올 길을 잊지 않을 겁니다."

맞잡은 두 손 사이로 유향의 서늘한 연기가 짧은 다리처럼 걸렸다가, 바람에 지워졌다.

아비틴은 그녀의 시선이 부두 쪽에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두고 왔는지 그는 끝내 묻지 않았다. 다만 제 망토의 앞섶을 조금 열어, 바닷바람이 그녀에게 덜 닿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말 대신 자리를 내어 주는 것. 그것이 이 이방의 왕자가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배가 부두를 밀어냈다.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그리고 오래, 아무 소리도 없었다.

물이 벌어지는 만큼 어둠도 벌어졌다. 부두의 무흔과 뱃전의 공주 사이로 바다가 들어찼다. 공주가 난간을 쥐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바람 너머로 목소리가 건너왔다.

"이 향이 다시 피는 날, 우리는 다시 만난다."

무흔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향낭을 두 손으로 감싸 가슴에 품었고, 배가 수평선의 한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세를 풀지 않았다.

비단이 바래는 데에 백 년이 걸렸다.

향 덩어리가 돌처럼 굳는 데에 다시 백 년이 걸렸다. 주머니는 손에서 손으로, 함에서 함으로 옮겨졌다. 이름들이 먼저 지워졌다. 지킨 사람들의 이름, 물려준 사람들의 이름, 끝내는 남긴 사람의 이름까지도.

함이 바뀌고, 집이 바뀌고, 나라의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도 주머니를 여는 사람은 없었다. 열면 안 된다는 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대대로, 같은 말이 함께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 향이 다시 피는 날—

뒷말을 아는 사람은 점점 줄었다. 그래도 앞말만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살아남았다.

사람의 이름은 흐려져도, 남겨 둔 향은 시간을 견뎠다.


◆ 2026년, 파리

박수 소리가 유리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메종 오델리크 신작 발표회. 조명은 무대 중앙의 향수병 하나에 쏟아졌고, 객석의 감탄은 파도처럼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물러갔다.

제목: 파리 향수 발표회 무대 뒤 어둠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것을 보는 프라랑 - 설명: 파리 향수 발표회 무대 뒤 어둠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것을 보는 프라랑


프라랑 김-오베르는 무대 뒤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여덟 달. 저 병 속의 향이 첫 스케치에서 마지막 숙성까지 지나온 시간이었다. 새벽의 실험실, 폐기한 시제품 이백일곱 개, 손끝에 배어 지워지지 않는 원료 얼룩. 전부 그녀의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첫 분사가 터졌다. 시향지가 객석으로 전달되는 동안, 프라랑은 눈을 감고도 그 향의 여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서늘한 꽃이 피고, 삼 분 뒤에 볕에 데워진 나무가 올라오고, 한 시간 뒤에는 낮고 부드러운 잔향만 옷깃에 남을 것이다. 객석 곳곳에서 낮은 탄성이 터질 때마다 그 시간표는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꼭 그만큼, 목이 탔다.

"메종 오델리크의, 새로운 기억입니다."

진행자의 목소리에 맞춰 대형 화면에 크레딧이 올랐다. 하우스의 이름. 아트 디렉터의 직함. 마케팅 총괄의 직함.

여덟 달 동안 그 향의 처음과 끝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 기억인데.

프라랑은 박수 소리 한가운데서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였다.

내 이름만, 없네.

곁에 선 어시스턴트가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이번에도, 명단에 없네요."

"응."

"항의 안 하세요?"

"했어." 프라랑은 무대 위의 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덟 달 전에도. 그 전에도."

발표회가 끝난 복도는 파티의 불빛을 유리 한 장 너머에 두고 있었다. 프라랑은 그 유리 바깥에 혼자 서서 봉투를 받았다.

"브랜드의 판단입니다."

담당자의 목소리는 사무적으로 미안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 선생."

성만 불렀다. 이 하우스에서 팔 년을 일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끝까지 정확히 발음해 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프라랑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항의도 하지 않았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시향지 뭉치와 미완성 샘플 세 병을 챙기고, 서랍 안쪽에 두었던 낡은 비단 리본을 꺼냈다. 청자색과 석류색이 바랜, 끝이 닳은 리본. 엄마의 유품이었다.

왼손목에 두 번 감아, 묶었다.

"그러면 내 이름은, 내가 가져갈게요."

복도 끝, 유리문 안쪽에서 샴페인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만든 향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초대장은, 오지 않았다.

파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목: 비 내리는 파리 골목을 혼자 걷는 프라랑과 왼손목의 낡은 리본 - 설명: 비 내리는 파리 골목을 혼자 걷는 프라랑과 왼손목의 낡은 리본


우산 없이 걸었다. 마레의 좁은 골목, 젖은 돌바닥 위로 주황 가로등 불빛이 길게 풀렸다.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멈추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해야 했으니까.

문득, 코끝만 미지근해졌다.

차가운 빗속에서, 손목께에서 올라온 온기였다. 눈을 감자 지베르니의 오후가 떠올랐다. 서랍을 열던 엄마의 손, 처음 손목에 리본을 감아 주던 체온. 그 기억의 끝에서 마른 모과 껍질의 담황빛 쓴맛과, 아주 먼 솔숲의 바늘 끝이 스쳤다.

그런 향이 남아 있을 리 없는 리본이었다. 이십 년 넘게 빨고 말린, 비에 젖은 낡은 비단에서.

프라랑이 손목을 코끝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빗소리를 끊고 진동했다.

할머니였다.

—보랑아, 아니 프라랑아. 경주 온나. 니 줄 기 있다.

프라랑은 처마 밑에 멈춰 서서 그 문자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웃음이 났다. 울고 있는데, 웃음이 났다.

경주. 일곱 살 여름마다 갔던 할머니의 도시. 마당에 향나무가 있고, 밤이면 능 사이로 달이 떴다. 엄마가 떠난 뒤로는 갈 이유를 만들지 못했던 곳.

니 줄 기 있다, 라니. 뭘까. 김치일까. 용돈일까. 아니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유였고, 할머니는 단 다섯 어절로 그것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빗물 맺힌 쇼윈도에 손가락으로 병 하나를 그렸다. 목이 긴 향수병. 그리고 그 라벨 자리에 또박또박 제 이름을 썼다.

프라랑.

빗물이 글자를 타고 흘러내려도, 한 번 쓴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프라랑은 편도 항공권을 끊었다.

그 시각, 바다 건너 경주.

굳게 닫힌 오래된 자개함 속, 어둠에 잠긴 천년의 향낭에서—사각.

제목: 자개함 안에서 천 년을 견딘 청자색과 석류색 비단 향낭의 세부 - 설명: 자개함 안에서 천 년을 견딘 청자색과 석류색 비단 향낭의 세부

마른 향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일러두기 — 이 이야기는 중세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1108~1111년경)가 노래한, 신라로 비정되는 나라 '바실라'의 왕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물입니다. 바실라와 신라, 등장인물과 실존 인물의 동일시는 연구자들의 학설로만 존재하며, 천년 향낭과 '굴 서라', 궁중 향 장인과 세부 사건은 모두 창작입니다.



1화. 황리단길에 무슨 향이 나요


신경주역의 문이 열리는 순간, 프라랑은 휴대전화의 계획표부터 확인했다.

10:12 도착. 10:20 택시 승차. 10:37 황리단길 도착. 11:00 매장 집기 검수. 파리에서 쓰던 그대로, 분 단위로 짜인 하루였다.

트렁크 두 개를 실은 택시가 출발했다.

"황리단길이요. 십칠 분이면 가죠?"

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흘끗 보았다.

"손님. 그 시간엔 차가 안 움직입니더."

"…네?"

"벚꽃철도 아이고 단풍철도 아인데, 요새 거긴 맨날 사람입니더. 마, 걸어가는 기 빠를 수도 있어예."

계획표의 첫 줄이 출발 팔 분 만에 무너졌다.

"가게 하러 오셨습니꺼?"

"네. 향수 가게요."

"향수라." 기사가 룸미러 속에서 웃었다. "경주는 원래 향 많은 동넵니더. 절 향도 있고, 솔 향도 있고."

"그라고 밥 냄새도 있고예. 황남빵 냄새도 있고."

"…그것도 향인가요?"

"손님." 기사가 진지해졌다. "배고플 때 함 맡아 보이소. 그기 젤 셉니더."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코끝이 먼저 서늘해졌다. 낮고, 오래되고, 넓은 냄새였다. 파리의 어느 원료 선반에도 없던 흙과 솔. 창밖으로 초록 능선이 천천히 흘러갔다. 언덕인 줄 알았던 그것이 천 년 전 사람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프라랑은 조금 뒤에야 알았다.

택시가 골목 초입에서 급정거했다.

관광객 무리가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트렁크가 트렁크 위로 미끄러졌고, 한옥 대문 앞에 내려놓는 순간 하나가 기어이 넘어가며 짐을 와르르 쏟아 냈다.

트렁크를 일으켜 세우다가, 프라랑은 잠깐 멈췄다.

골목에는 냄새가 겹겹이었다. 갓 구운 빵의 단내, 커피, 달궈진 기와의 흙내, 그리고 그 전부의 아래를 받치는 오래된 나무 냄새. 파리의 골목이 향수 매장의 진열대라면, 이 골목은 통째로 원료 창고였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라고, 그때까지는 생각했다.

"할머니!"

마당을 가로질러 나온 백령 여사는 손녀를 안아 주는 대신 트렁크 개수부터 셌다.

"향수 가게라 카더니, 이삿짐이 향보다 많네."

"…저도 보고 싶었어요."

"밥은."

"아직요."

"묵고 하자."

그것이 칠 년 만의 재회 인사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파리에서 들은 어떤 위로보다 등이 펴졌다.

백령의 밥상은 간단하고 정확했다. 뜨거운 국, 갓 지은 밥, 마당에서 딴 푸성귀. 스물두 시간 만의 첫 끼를 비우는 동안 백령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파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왜 연락이 뜸했는지도.

다만 밥그릇이 비자, 한마디를 얹었다.

"잘 왔다."

대문 안은 공사가 반쯤 끝나 있었다. 대릉원 돌담이 건너다보이는 한옥 마당, 그 위에 파리에서 부친 시향 바와 유리 선반이 놓였다. 나무 기둥과 유리가 어색하게, 그러나 싫지 않게 붙어 있었다.

제목: 봄날 황리단길 한옥 향수 아틀리에 앞에 도착한 프라랑 - 설명: 봄날 황리단길 한옥 향수 아틀리에 앞에 도착한 프라랑

"대표님! 오셨어요? 잠깐, 그대로 계세요!"

콘텐츠 매니저 오하늘이 짐벌을 들고 뒷걸음질쳤다.

"'파리에서 경주로', 첫 영상 갑니다. 삼, 이, 일—"

"하늘 씨. 나 지금 스물두 시간째 같은 옷이야."

"그게 서사예요, 대표님."

하늘은 서울에서 브랜드 마케팅을 하다가 '경주에서 향수 브랜드를 시작한다'는 채용 공고 한 줄에 짐을 싸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면접에서 그녀는 딱 한 문장을 말했다. 이 조합, 무조건 됩니다. 프라랑은 그 근거 없는 확신이 마음에 들어서 뽑았다.

제목: 콘텐츠 매니저 오하늘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 설명: 콘텐츠 매니저 오하늘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프라랑은 한숨을 쉬다가, 그냥 웃어 버렸다. 상관없었다. 여기서는 향 앞에 그녀의 이름이 붙는다. 메종 프라랑. 그거면 됐다.

저녁 무렵 간판이 걸렸다. MAISON FRARANG. 그 아래 한글로, 메종 프라랑. 프라랑은 사다리 아래에서 그 글자를 오래 올려다보았다. 파리의 어떤 크레딧 화면보다 작았지만, 파리의 어떤 크레딧 화면에도 없던 것이 거기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었다.

오후, 첫 시제품 디퓨저를 켰다.

갓 벗긴 과일 껍질처럼 가볍게 올라가, 잘 다린 리넨처럼 반듯하게 내려앉는 향이었다. 마당 가득 향이 도는 것을 확인한 프라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향이 뒤뜰 담장을 넘어가리라는 것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담장 너머, 문향재.

서도경은 저울 앞에 있었다. 접시 위 향재를 0.1그램 단위로 덜어 내고, 절구로 옮기고, 체에 내렸다. 절굿공이가 돌 때마다 마른 나무 갈리는 소리가 방 안의 시간을 고르게 나눴다.

절굿공이가, 멈췄다.

작업대 끝에 배를 깔고 있던 고양이가 먼저 코를 실룩였다. 그리고 재채기를 했다.

"…이 단내가 어디서."

"냐앙."

도경이 창가로 갔다. 담장 너머에서 달고 매끄러운 것이 넘어오고 있었다. 그가 반나절을 들여 앉혀 놓은 향 위로 그것이 사뿐히 내려앉아, 전부를 흐트러뜨렸다.

창문이 쾅, 닫혔다.

같은 순간, 담장 이쪽에서는 프라랑의 시향지가 실패했다.

"…뭐야, 이 탄내."

오 분 뒤, 담장 양쪽에 사다리가 하나씩 걸렸다.

프라랑이 먼저 올라갔다.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정확히 같은 높이에서 낯선 남자의 얼굴이 마주 올라왔다.

제목: 한옥 담장 위 두 사다리에서 처음 마주친 프라랑과 서도경 - 설명: 한옥 담장 위 두 사다리에서 처음 마주친 프라랑과 서도경

짙은 일자 눈썹. 숯색 작업복에 소나무색 앞치마. 그리고 대단히 못마땅한 눈.

두 사람은 삼 초쯤 서로를 관찰했다. 프라랑은 상대의 앞치마에 밴 재와 수지의 층을 반사적으로 분류했고, 도경은 상대에게서 풍기는 향수의 구조를 반사적으로 헤아렸다. 그리고 둘 다, 상대가 방금 자신을 분석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첫인상은 그래서 더 나빠졌다.

"이 연기." 프라랑이 선수를 쳤다. "제 아틀리에에 들어왔어요."

"그짝 향부터 우리 방 안에 들어왔는데예."

"저희는 향수예요. 조향이라고요. 그쪽은—연기잖아요."

"우리는 향입니더. 그짝은 설탕물이고."

"뭐라고요?"

"공해라예." / "공해예요."

말이 정확히 겹쳤다. 두 사람은 담장 위에서 잠깐 서로를 노려보았다. 담장 아래에서 하늘이 슬그머니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마당 끝에 선 백령의 눈빛에 도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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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아주 짧게, 무언가 계획이 있는 사람의 웃음이 지나갔다.

전쟁의 첫날 오후는 양쪽 모두에게 손해였다.

메종 프라랑의 첫 시향 손님은 시향지를 코에 대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 향… 절에서 나는 냄새 같지 않아요?"

문향재의 단골은 향을 사르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행님. 오늘 향에서 와 복숭아 냄새가 납니꺼."

"복숭아 아이고, 살구."

반사적으로 정정한 도경은, 정정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담 너머의 향을 이미 원료 단위로 외워 버렸다는 뜻이었으니까.

프라랑은 오염된 시향지 묶음을 폐기통에 던졌다.

"침향은 좋아요. 좋은데—지금은 내 향이 아니잖아요."

도경은 향합 뚜껑을 소리 나게 닫았다.

"좋은 향도 자리가 틀리면, 잡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두 사람은 각자의 가게에서 동시에 민원 앱을 열었다.

다음 날, 경주시청 민원 창구. 대기 번호 37번과 38번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번호가 불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37번 손님, 어떤 일로 오셨—"

"옆집 연기요." / "옆집 향수 말입니더."

동시에 말했고,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았고,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직원이 모니터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분이, 담 하나 사이 맞지예?"

"네." / "네. 그래서 문제예요."

직원은 규정집을 한참 뒤적이다 결국 안경을 벗었다. 생활 향기는 단속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당사자끼리 자율 협의를 하시는 게 좋겠다는 것. 요컨대—알아서 하시라는 뜻이었다.

"이웃끼리, 예? 잘 좀 지내 보이소."

이웃끼리. 두 사람은 같은 단어에 같은 표정으로 질색했다.

대기석의 다른 민원인들이 어느새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돌아 나오는 복도, 게시판 앞에서 두 사람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제1회 경주 향 문화 공모전 — 전통×현대 협업 부문」

「대상 수상팀: 상금 및 경주 향 축제 무대 시연 기회」

프라랑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세 줄을 읽었다. 도경은 팔짱을 낀 채 네 줄을 읽었다.

"전통 파트너야, 뭐. 찾으면 많겠지." 프라랑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현대 향수 하는 데가 저 집만 있는 것도 아이고." 도경도 혼잣말처럼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각자 모퉁이를 돌자마자 되돌아와, 상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공고문의 QR코드를 몰래 찍었다.

찍는 순간 서로의 인기척을 느꼈지만, 둘 다 뒤돌아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날 밤. 담장 양쪽에서 두 개의 노트북이 동시에 열렸다.

신청 자격, 두 번째 줄에서 두 사람의 스크롤이 동시에 멈췄다.

「※ 전통 제향 부문과 현대 조향 부문의 공동팀 구성 필수. 단독 출품 불가.」

"……."

"……."

프라랑은 노트북을 덮었다.

"절대. 저 사람은 아니야."

도경은 신청서 창을 닫았다.

"그 여자만 빼고."

프라랑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전통 장인. 경주에 그 사람 하나뿐일 리 없다. 내일부터 찾으면 된다. 찾으면, 되는데.

담 너머에서 낮게, 절굿공이 도는 소리가 들렸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저 사람은 매일 저 시간까지 향을 만드는구나—생각하다가, 그녀는 생각을 멈췄다.

알 바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몇 초 뒤, 두 개의 창문이 아주 조금, 다시 열렸다.

창틈으로 밤바람이 지나갔다. 갓 벗긴 과일 껍질 같은 향과 마른 나무 타는 향이 처음으로 같은 바람 속을 나란히 흘렀다. 섞이지는 않았다.

아직은.

불 꺼진 시청 복도, 게시판의 공고문만이 어둠 속에서 같은 문장을 붙들고 있었다.

전통과 현대—공동 출품만 가능.


2화. 향기 전쟁


"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

다음 날 아침, 오픈 준비 중이던 프라랑 앞에 하늘이 노트북을 돌려놓았다. 화면 속에는 어제의 담장이 있었다. 사다리 위에서 마주 보고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지만, 자막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황리단길,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향기 전쟁(?)」

"…이걸 올렸다고?"

"어젯밤에요. 조회수 보세요."

숫자는 프라랑의 상식보다 자릿수가 하나 많았다.

"하늘 씨. 이건 캠페인이 아니라 민원이야."

"싸움도 서사가 있으면 캠페인이에요." 하늘은 진지했다. "그리고 이미 늦었어요. 아침 첫 손님이 '그 담장이 어디예요?'부터 물었거든요."

"내려 주세요. 지금이라도."

"내리면 더 이상해요. '내려간 영상'으로 또 뜨거든요." 하늘이 화면을 넘겼다. "차라리 이 관심을 쓰세요, 대표님. 오픈 초반에 제일 비싼 게 관심이에요."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얄미웠다.

프라랑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조향사답게 결론을 냈다.

판이 깔렸으면, 이기면 된다.

한 시간 뒤, 메종 프라랑 앞에 입간판이 섰다.

「오늘 하루, '서라벌의 아침' 무료 시향」

시향지가 부채꼴로 펼쳐졌다. 줄이 만들어졌다.

"이건 무슨 향이에요?"

"경주의 솔바람이, 아침 과일 껍질을 스치는 순간이에요."

손님이 시향지를 코에 대면 먼저 콧등이 서늘해진다. 그다음 이른 아침 골목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마지막에 갓 깎은 모과 껍질의 산뜻한 쓴맛이 혀 안쪽에 남는다. 손님들의 눈이 커질 때마다 프라랑의 어깨가 오랜만에 반듯해졌다. 향의 사연을 묻는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파리에서보다 말이 많아졌다.

백발의 어르신 한 분이 시향지를 오래 코에 대고 있었다.

"아가씨. 이거 내 어릴 적, 학교 가던 새벽 골목 냄새 같네."

"…그 골목에 솔이 있었어요?"

"있었지. 서리 앉은 솔."

프라랑은 그 자리에서 수첩을 꺼내 적었다. 서리 앉은 솔. 파리에서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종류의 시향 평이었다. 데이터는 아니었지만, 데이터보다 정확했다.

점심때쯤에는 시향 줄이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하늘은 줄 선 사람들에게 시향지를 나눠 주며 실시간 중계를 했고, 프라랑은 목이 쉬는 줄도 모르고 향을 설명했다.

제 이름을 걸고 하는 첫 장사였다. 힘들 이유가, 없었다.

담장 너머에서 도경이 그 입간판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한 시간 뒤, 문향재 앞에도 손글씨 한 장이 붙었다.

「전통 향낭 만들기 — 무료 체험」

도경은 말수가 적었다. 대신 손이 말했다. 비단을 접는 손, 향재를 계량하는 손, 매듭을 짓는 손. 평상에 둘러앉은 참가자들이 그 손을 홀린 듯 따라 했다.

"향은 맡고 끝나는 기 아니라." 도경이 완성된 향낭 하나를 들어 보였다. "몸에 지니는 깁니더."

매듭을 세 번 실패한 아이가 울상이 되자, 도경은 말없이 아이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굵은 손가락이 작은 손가락의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매듭이 지어졌다. 아이가 향낭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웃었고, 구경하던 어른들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목: 향기 전쟁 행사에서 아이의 향낭 매듭을 도와주는 도경과 촬영하는 하늘 - 설명: 향기 전쟁 행사에서 아이의 향낭 매듭을 도와주는 도경과 촬영하는 하늘

무뚝뚝한 게 아니라, 말이 손에 있는 사람이구나.

담장 너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프라랑은, 자신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참가자들의 손목에서, 가방끈에서, 마른 나무와 재의 냄새가 골목으로 번져 나갔다.

점심 무렵, 골목은 수습이 불가능해졌다.

하늘이 어느 틈에 만들어 돌린 '팀 파리'와 '팀 서라벌' 스티커를 가슴에 붙인 관광객들이 양쪽 가게를 오가며 투표를 벌였다. 프라랑의 가게에서 향낭을 찾는 손님과, 문향재에서 시향지를 찾는 손님이 뒤섞였다.

"둘이 세트 아니에요?"

"아닙니다." / "아입니더."

부정마저 화음이었다.

"저기, 향낭 만들기는 어디서 해요?"

"옆집이요." 프라랑이 답했다.

"무료 시향은 어느 쪽이에요?"

"옆집입니더." 도경이 답했다.

안내가 겹치고, 동선이 꼬이고, 결국 두 사람은 골목 한가운데서 등을 맞댄 채 반대 방향의 손님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등과 등 사이의 거리는 한 뼘이었다. 하늘의 카메라가 그 한 뼘을 놓치지 않았다.

손님을 각자 자기 쪽으로 안내하다 보면 두 사람의 동선이 자꾸 겹쳤다. 어깨가 스칠 때마다 반 박자씩 물러났고, 물러난 자리로 또 손님이 밀려들었다.

결정타는 침향이였다. 문향재의 고양이가 하필 프라랑의 매대 아래에 배를 깔고 낮잠을 자는 장면이 목격된 것이다.

"침향아." 도경이 낮게 불렀다. "니 지금, 어느 편이고."

"냐앙."

침향이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배신자." 도경이 중얼거렸다.

"동물은 향에 정직해요." 프라랑이 매대 뒤에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집 디퓨저가 편한가 보죠."

"저 녀석은 원래 아무 데서나 잡니더."

"방금 그 말, 고양이한테 좀 미안하지 않아요?"

침향이가 길게 하품을 했다. 논쟁은 무승부였다.

저녁이 되자 「황리단길 향기 대전」은 밈이 되어 있었다. 댓글이 달리고, 패러디가 만들어지고, 지도 앱의 저장 수가 뛰었다. 하늘은 난립하는 해시태그를 하나로 통일해 아예 골목 전체의 홍보로 바꿔 버렸다.

댓글창에서는 이미 세계관이 자라고 있었다.

—전통 장인님 손 보소. 저건 못 이김

—파리 조향사님 설명 듣고 향수 입문함

—근데 둘이 왜 담 하나 사이임? 운명 아님?

운명이라는 단어에 프라랑은 코웃음을 쳤다. 운명은 무슨. 부동산의 우연이지.

"두 분이 싫어할수록 알고리즘은 좋아해요."

하늘의 명언이 박제되던 그 시각—

바다 건너 어느 도시, 불 꺼진 방에서 누군가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화면을 확대하는 길고 유연한 손가락. 새끼손가락의 오래된 금반지가 모니터 불빛을 되받아 잠깐 반짝였다.

손가락이, 재생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폐점 시간.

프라랑의 진열대는 비어 있었다. 완판이었다. 문향재의 체험 바구니도 바닥을 보였다.

두 사람은 각자의 마당에서, 공교롭게도 같은 담장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다.

"오늘…." 담장 너머로 프라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님, 많았죠?"

"우리 손님입니더."

"…방금 그 말 취소."

"뭐를예."

"고마워하려던 거요."

"……." 담장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황남빵 남은 거 있는데."

"네?"

"체험 손님이 주고 간 깁니더. 나는 단 거 안 묵어서."

담장 위로 종이봉투 하나가 넘어왔다. 프라랑은 그것을 받아 들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봉투를 열기도 전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잘 먹을게요."

"버리는 깁니더."

"네네. 버리는 거."

담장 위로 두 향의 잔향이 잠깐 닿았다가, 다시 갈라졌다.

그때 골목 끝에서 서류 가방을 든 낯선 남자가 문향재 옆 건물 외벽에 종이 한 장을 붙이고 사라졌다.

밤이 깊어서야 도경은 그 종이를 보았다.

「건물 매각 예정 안내」

붙인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풀 냄새가 아직 축축했다. 도경의 손이 종이 모서리에 닿았다가, 떼지 못하고 멈췄다.

문향재가 이 골목에서 향을 만든 지 백삼십 년. 그러나 건물은 문향재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자리를 지키려면 새 조건에 맞는 추가 보증금이 필요했고, 안내문의 숫자는 향을 팔아 모을 수 있는 단위가 아니었다.

주머니 속 전화가 울렸다. 임대인이었다.

"예. …예, 압니더." 도경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기한 안에, 마련해 보겠심더."

전화가 끊긴 골목에 재 냄새만 낮게 가라앉았다.

도경은 공방으로 돌아와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손은 도구들의 자리를 알았다. 조부의 조부 때부터 돌았다는 절구. 손잡이가 손 모양으로 닳은 황동 약숟가락. 백삼십 년 치 손때가 앉은 것들.

그 사이 어디에도, 건물의 등기부만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뭐라 하실까. 요양 중에도 향 말리는 날씨부터 묻는 양반인데.

도경은 그 생각을 접어 서랍 깊이 넣었다. 걱정은 향에 밴다. 그것이 조부에게 배운 첫 가르침이었다.

맞은편 어둠 속에서 프라랑이 그 등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모른 척 돌아섰다. 남의 가게 사정이었다. 남의. 가게. 사정.

돌아서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그날 밤, 문향재의 사무상 위에는 임대인의 안내문이, 메종 프라랑의 노트북 화면에는 공모전 공고가 떠 있었다.

추가 보증금 액수와, 공모전 대상 상금.

두 숫자는 정확히 같았다.

도경에게 공모전은 이제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남은 현실적인 돌파구였다. 그리고 프라랑에게는—파리가 지운 이름을 제 손으로 증명할 첫 무대였다.

거의 같은 순간, 담장 쪽문의 손잡이가 양쪽에서 돌아갔다.

문이 열렸다.

"잠깐 얘기합시다." / "잠깐 얘기 좀 해요."

말이 또 겹쳤다. 침묵이 흘렀다.

"…먼저 하세요." 프라랑이 말했다.

"공모전." 도경이 말했다. "같이 나갑시다."

"…조건이 있어요." 프라랑이 말했다. "이건 동업이 아니라 프로젝트예요. 기간 한정."

"바라던 바입니더."

"그리고 규칙을 정할 거예요. 문서로."

"문서, 좋지예."

두 사람은 평상에 마주 앉아 신청서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팀 소개란 앞에서 십 분을 싸웠고, 출품 방향란 앞에서 이십 분을 싸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싸우는 동안 문장은 점점 좋아졌다.

서로의 단어를 반박하려면, 서로의 단어를 정확히 들어야 했으니까.

밤이 다 가기 전에, 평상 위에 공동 신청서가 펼쳐졌다. 대표자 서명란은 두 칸이었다.

두 개의 펜 끝이, 동시에 내려왔다.


3화. 강제 콜라보


서류를 들고 시청을 다시 찾은 날, 담당자는 신청서보다 두 사람의 얼굴을 먼저 검토했다.

"공동팀, 맞지예?"

"네." / "예."

"공동 개발 과정을 증빙하셔야 됩니더. 회의록이든 사진이든예. 이름만 같이 올리는 건 안 됩니더."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프라랑이 말했다.

"표정은 그런데예." 도경이 옆에서 말했다.

"지금 그쪽 표정이 더 그래요."

담당자는 두 사람을 한참 번갈아 보다가, 뭔가 포기한 얼굴로 접수 도장을 찍었다.

"…잘, 부탁드립니더."

청사를 나서며 두 사람은 세 걸음 간격으로 걸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딱 서류상 동료의 거리였다.

"증빙이래요. 회의록." 프라랑이 앞을 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쓰지예." 도경도 앞을 보며 답했다.

"첫 줄은 뭐라고 써요?"

"…'싸우지 않기로 함'은 우째 보입니까."

"거짓말로 시작하는 회의록은 좀."

같은 날 오후, 공유 담장 아래 평상에서 협약이 체결되었다.

프라랑이 노트를 펴고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규칙부터 정하죠."

제1조. 상대의 작업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제2조. 상대의 향을 비하하지 않는다.

제3조. 작업에 필요하지 않은 사적 대화는 하지 않는다.

"감정은 배제하죠." 프라랑이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없었는데예."

"…프로젝트명은요?"

도경이 잠깐 담장 너머 대릉원 쪽을 보았다.

"천년향."

"임시로는, 나쁘지 않네요."

악수를 하려고 프라랑이 손을 내밀었을 때 도경은 서류를 집고 있었고, 도경이 손을 내밀었을 때 프라랑은 노트를 덮고 있었다. 두 번 엇갈린 끝에, 두 사람은 악수 대신 각자 고개만 까딱했다.

계약은 발효 세 시간 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1조가 먼저 깨졌다. 원료 상태를 확인하겠다며 프라랑의 발이 문향재 작업실 문지방을 넘은 것이다.

"여기부터 제 작업 구역인데예."

"원료 얘기잖아요. 일 얘기는 침범이 아니죠."

제2조는 그날 오후에 깨졌다.

"이 배합은 너무 무거워요. 숨이 눌린다고요."

"그짝 향은 너무 얕아가, 삼십 분이면 도망갑니더."

"지금 비하죠?" / "그짝이 먼저 했는데예."

제3조만이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도경이 "부모님도 향 일을—" 하다가 입을 닫았고, 프라랑은 그의 오른팔 안쪽 오래된 화상 자국에 시선이 갔다가 "그 흉터는—" 하고는 말을 삼켰다.

유일하게 계약서를 읽지 않은 침향이만이 자유로웠다. 고양이는 두 작업 구역의 경계선을 하루에 스무 번쯤 넘나들었고, 급기야 프라랑의 시향지 묶음 위에 자리를 잡더니 꼬리로 원료 병을 쓸어 넘어뜨릴 뻔했다.

"침향아. 니는 중립 아이가."

"쟤가 무슨 중립이에요. 아까 우리 집 참치 먹었는데."

"…참치를 줬습니까?"

"제1조 위반은 그쪽 고양이가 먼저 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다투는 사이사이, 두 사람은 자꾸 멈칫했다.

프라랑이 저울 없이 눈대중으로 덜어 낸 원료를 도경이 저울에 올렸을 때, 눈금은 그녀가 말한 숫자에서 머리카락만큼도 벗어나지 않았다.

"…0.01그램 틀린 것도 압니까?"

"향은 거짓말 안 하니까요."

반대로 도경은 원료 병을 열지도 않은 채 유리 너머 코끝만으로 향재의 산지와 건조 상태를 맞혔다. 프라랑은 잠깐 말을 잃었다. 파리의 어떤 분석기도 그 속도로는 못 하는 일이었다.

해 질 녘, 안채 마루에서 백령이 두 사람을 불렀다.

"둘 다, 일로 온나."

백령은 두 사람이 마루에 걸터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판을 뒤집었다.

"맨날 새 향 갖고 싸우지 말고. 그라믄—진짜 옛 향도 한번 맡아 볼래?"

안채 깊은 곳에서 오래된 자개함이 나왔다.

제목: 백령이 오래된 자개함을 열어 프라랑과 도경에게 향낭을 보여 주는 장면 - 설명: 백령이 오래된 자개함을 열어 프라랑과 도경에게 향낭을 보여 주는 장면

백령의 손이 겹겹의 천을 풀었다. 한 겹. 두 겹. 세 겹째 천이 걷히자,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향낭이 있었다.

손바닥의 삼분의 이쯤 되는 크기. 청자색과 석류색 실을 섞어 짠 비단은 바랠 대로 바래 있었고, 매듭은 낡아 반들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향낭은 아직 한 뼘 밖에 있는데, 방 안의 냄새가 달라진 것 같았다. 실제로 달라졌을 리 없었다. 겹겹의 천 속에서 천 년을 버틴 향이, 뚜껑 하나 열렸다고 방을 채울 리가. 그런데도 프라랑의 숨이 저 혼자 깊어졌다.

프라랑의 왼손목이 저 혼자 움찔했다.

엄마의 리본. 청자색 위로 석류색이 지나가는 그 간격이—닮아 있었다.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눈이 자꾸 손목의 리본과 향낭 사이를 오갔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천 년 됐다 카더라." 백령은 남 얘기하듯 말했다. "역사책에 박힌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집이, 지켜 온 이야기지."

백령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옛날 서라벌에, 향을 만드는 왕녀가 있었다고 했다. 바다 건너에서 온 왕자를 사랑했고, 함께 떠나던 밤 자신의 향낭을 이 땅에 남겼다고 했다. 사람들이 서라벌의 꽃이라 부르던 향. 이 향이 다시 피는 날 돌아오겠다던, 약속.

프라랑은 이야기를 들으며 장면들을 그려 보았다. 말을 달리는 여자. 낯선 깃발의 배. 향낭 위에 겹치는 두 손. 그림은 물에 번진 채색화처럼 흐릿했고, 얼굴들은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 공주는… 돌아왔어요?"

"글쎄다." 백령은 먼 데를 보았다. "돌아왔으믄, 이 향낭이 와 아직 여 있겠노."

"프라랑." 백령이 손녀를 불렀다. "니 이름은, 예쁜 소리만 보고 지은 게 아니다."

"…무슨 뜻이에요?"

백령은 대답 대신 향낭을 다시 천으로 덮었다.

"오늘은 여까지. 향이나 마저 보그라."

프라랑은 더 묻지 못했다. 할머니의 손이 향낭을 덮는 그 동작에는, 오래 닫아 둔 문 특유의 단호함이 있었다.

도경이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실무로 돌린 것은, 아마 그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이 향낭. 저희가 분석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날 밤, 메종 뒤뜰 아틀리에.

"긁으면 안 됩니더." 도경이 먼저 선을 그었다. "남은 걸 없애 가며 찾으면, 그건 복원이 아니지예."

"기록부터. 동의해요."

두 사람의 손발이 처음으로 맞았다. 프라랑이 밀폐 챔버에 향낭을 안치하고 공기 중의 향 성분을 채집하는 동안, 도경은 함 바닥에 오래전부터 떨어져 있던 미세한 향 조각을 핀셋으로 옮겼다. 향낭 본체에는 바늘 끝 하나 대지 않았다.

제목: 어두운 작업실에서 프라랑과 도경이 손상 없이 향낭의 성분을 분석하는 장면 - 설명: 어두운 작업실에서 프라랑과 도경이 손상 없이 향낭의 성분을 분석하는 장면

조명을 낮추고. 온도를 맞추고. 건네고, 받고.

말은 반으로 줄었는데 일은 두 배로 빨라졌다.

프라랑은 문득 그 사실이 낯설었다. 파리의 실험실에서는 누구와 일해도 설명이 길었다. 여기서는 도경이 손을 내밀면 그 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그녀가 눈짓을 하면 조명이 낮아졌다.

취향은 정반대인데, 향을 대하는 몸의 문법이 같았다.

"…뭘 봅니까."

"아무것도요. 다음 샘플 주세요."

인정하기 싫은 것은, 서로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제." 도경이 말했다. "맡아 봅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시향 덮개에 손을 얹었다.

덮개가 열렸다.

향은 소리 없이 올라왔다.

프라랑은 숨을 들이켰다. 먼저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데워졌다. 그다음 눈두덩이 뜨거워졌다. 이유를 몸이 먼저 알고,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순서였다.

엄마의 서랍. 지베르니의 오후. 리본을 손목에 감아 주던 체온.

그 기억들 위로, 처음 맡는 것이 겹쳐 올라왔다. 오래 견딘 나무의 숨. 굳은 수지 틈에서 아주 느리게 배어 나오는 무겁고 깊은 잔향. 천 년쯤 눌러 둔 시간이 있다면, 이런 냄새일 것 같았다.

"이 향…."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알아요."

"……."

"아는데. 어디서인지를, 모르겠어."

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프라랑이 돌아보았을 때, 그는 시향 덮개가 아니라 어딘가 훨씬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담장 너머, 지붕 너머, 이 도시에 없는 어떤 곳. 동공이 멈춰 있었다. 입술이 아주 조금 벌어져 있었다.

"…나는, 모르는 향인데."

그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몸이, 압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도경이 홱 돌아섰다. 덮개를 닫는 손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서둘렀다.

"…알레르기다."

"네?"

"장미하고 유향. 그 계열에 알레르기가 있어가."

프라랑은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도경은 받지 않고 소매로 눈가를 눌렀다. 귀 끝이 붉었다.

"알레르기는 보통." 프라랑이 말했다. "한쪽 눈만 울지 않아요."

"……."

"놀리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로 웃지 않았다. 대신 샘플 용기를 하나하나 밀폐하고 라벨을 붙였다. 이 향이 누군가에게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함부로 다루지는 않겠다는 손놀림이었다.

도경이 곁눈으로 그 손을 보았다. 굳어 있던 어깨의 날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자정을 넘겨, 분석기가 첫 결과를 뱉었다.

모니터 위로 봉우리들이 솟았다. 장미. 유향. 침향. 모과. 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나란히 섰다.

"다섯 원료라." 도경이 화면을 짚었다. "구전이랑 맞네예."

"그런데."

프라랑의 손가락이 그 옆, 여섯 번째 봉우리 앞에서 멈췄다.

다른 봉우리들보다 낮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름표가 붙지 않은 봉우리 하나.

화면 위에 뜬 글자는 단 하나였다.

UNASSIGNED — 미지정.

프라랑과 도경은 동시에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깨가 닿을 뻔했고, 이번에는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장비 오류일 수도 있어요." 프라랑이 말했다. 스스로도 믿지 않는 목소리였다.

"두 번 돌려도 같으믄예?"

"…그럼 우리가 모르는 게 있는 거죠."

도경이 재분석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낮게 웅웅거리며 두 번째 답을 준비하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모니터만 보았다.

결과가 떴다.

같았다.

침묵 속에서 프라랑은 저도 모르게 손목의 리본을 만졌다. 낡은 비단이, 평소보다 조금 따뜻한 것 같았다.

천 년 전의 향낭 속에, 지금의 데이터베이스가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 일러두기 — 백령이 들려주는 공주 이야기는 작중 가문의 구전이라는 설정이며,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4화. 달빛 아래 대릉원


새벽 두 시의 아틀리에는 기계 소리로 숨을 쉬었다.

미지정 봉우리는 사흘째 이름을 거부하는 중이었다. 프라랑의 디지털 노트에는 지워진 가설이 열일곱 개. 도경의 수기 원료표에는 붓펜으로 그은 취소선이 꼭 그만큼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프라랑이 모니터를 짚었다. "단일 원료로 검색하면 계속 어긋나요. 그런데 조합으로 보면—"

"모과하고 침향." 도경이 제 표에서 두 줄을 짚었다. "이 두 계열이 겹치는 구간에서만, 미지정이 같이 뜨네예."

두 기록을 나란히 놓자 보였다. 다섯 원료 가운데 두 계열이 겹치는 자리에서만, 그 이름 없는 신호가 희미하게 따라 일어섰다.

"데이터에 없는 한 가지가 아니라." 프라랑이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모르는, 만드는 법일 수도 있어요."

"재료보다 시간이 레시피다?"

"가설이에요. 결론은 아니고."

"가설." 도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기 표 맨 위에 적었다. 확정 아님.

프라랑은 그 네 글자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파리의 연구소였다면 소프트웨어가 자동으로 붙였을 태그를, 이 사람은 붓펜으로 꾹 눌러썼다. 이상하게, 그쪽이 더 믿음직했다.

소파에서는 하늘이 편집을 하다 잠들어 있었고, 침향이는 온기가 남은 분석기 위에 몸을 말고 있었다. 아틀리에는 어느새, 네 식구의 밤을 닮아 가고 있었다.

프라랑이 세 번째 커피를 내리려고 일어섰을 때, 도경이 말없이 분석기의 전원을 내렸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돌리던—"

"기계도 식을 시간이 필요합니더." 도경이 겉옷을 걸쳤다. "사람도예."

골목은 형광등의 세계에서 달빛의 세계로 넘어가 있었다.

대릉원 돌담길 초입. 두 사람은 딱 한 사람분의 간격을 두고 걸었다. 그 간격은 며칠 전보다 좁아진 것도, 넓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어제와는 다른 간격 같았다.

돌담길로 접어들 때, 도경이 반걸음 먼저 방향을 틀어 차도 쪽에 섰다. 본인은 그러는 줄 모르는 눈치였고, 프라랑은 모르는 척해 주었다.

"확실히 해 두는데." 프라랑이 말했다. "데이트 아니죠?"

"기계 냉각 시간입니더."

"…물어본 내가 졌네."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낮 동안 데워진 흙이 식으며 내놓는 숨. 이슬에 눌린 풀이 배어 내는, 낮고 넓게 깔리는 냄새. 프라랑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이 도시의 밤은 향이 바닥에 깔리는구나. 파리의 밤이 벽에서 배어 나오는 냄새라면, 여기는 땅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

"지금 코로 지도 그리고 있지예."

"…어떻게 알았어요?"

"콧구멍이 바쁘길래."

"조향사한테 그런 말은 칭찬이에요."

밤의 대릉원 초입은 관광객이 빠져나간 뒤라 고요했다. 돌담이 낮 동안 머금은 온기를 천천히 뱉어 냈고, 두 사람의 발소리만 또박또박 그 위에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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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너머로 능선이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그 어두운 곡선 뒤편으로 카페의 불빛이 점점이 따뜻했다.

"신기해요." 프라랑이 담에 손을 얹었다. "여긴 무덤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사랑을 하네요."

"천년 같이 살다 보믄." 도경은 능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이웃인 기라."

"이웃." 프라랑은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천오백 년 전에 잠든 이웃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살아 있는 이웃. 이 도시에서는 그 둘이 같은 골목을 썼다.

"파리는요." 그녀가 말했다. "죽음이 도시 바깥에 있어요. 담장 높은 묘지 안에요. 면회 가듯이 만나러 가죠."

"여는 그냥 같이 삽니더. 아침에 능 보고, 저녁에 능 보고."

"안 무서워요?"

"무서울 기 뭐 있습니까. 천 년을 저래 조용한 이웃인데."

"그쪽은요." 그녀가 물었다. "왜 향을 지켜요?"

도경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능선 위에 달이 둥글게 걸려 있었다.

"할배 때문이지예." 마침내 그가 말했다. "여섯 살에 처음 절구를 잡았습니더. 할배가 그랬어예. 향은 사람보다 오래 남는다고.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고예."

"지금은요?"

"지금은." 그가 잠깐 멈췄다. "쪼매, 알 것 같고."

"할아버님은, 지금도 향을 만드세요?"

"요새는 몸이 좀 그래가." 도경은 능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만든 거를 맡아 주십니더. 잘못 만들면 귀신같이 아시고예."

"엄격하시네요."

"코가 엄격하지예. 사람은… 안 그렇습니더."

프라랑은 담 모서리에 기대어 손목의 리본을 내려다보았다.

"엄마 얼굴이 흐려져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해서 스스로 놀랐다. "목소리도요. 사진을 봐야 기억나요. 그런데 향은 안 흐려져요. 서랍을 열던 순간의 그 냄새는, 십오 년이 지나도 어제 같아요."

"……."

"그래서 이 일을 해요. 향수는 액체가 아니에요. 시간을 병에 담는 일이죠."

"그래서 그리 독하게 만듭니까."

"칭찬으로 들을게요."

"칭찬 맞습니더."

도경이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보았다. 달빛 아래의 그 눈은, 사다리 위에서 처음 마주쳤던 못마땅한 눈이 아니었다.

달이 능선 위에서 희고 둥글었다. 천 년 전에도 저 달은 저렇게 떴을 것이다. 그리고 천 년 전의 어느 낮에는—꼭 저 달만 한 공 하나가, 흙먼지 속을 날았을 것이다.

◆ 그 맹세보다 몇 해 전 — 서라벌 격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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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온 이들에게 서라벌은 환대와 경계를 같은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아비틴은 그 온도를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연회에서는 상석을 받았지만, 훈련장에서는 아무도 그에게 채를 건네지 않았다. 손님이란 그런 것이었다. 구경할 수는 있어도, 함께 뛸 수는 없는 사람.

그날 격구장에서, 흙먼지를 가르며 공을 낚아채는 기수가 있었다. 말의 목에 몸을 눕혀 하나가 된, 작지만 정확한 몸. 기수가 몸을 일으키자 훈련장이 술렁였다.

공주였다.

프라랑 공주는 말을 몰아 그의 앞에 섰다. 이방인을 구경거리로 훑는 눈이 아니었다. 상대를 재는, 선수의 눈이었다.

"말은 타실 줄 압니까?"

아비틴은 건네받은 채를 쥐며 웃었다.

"따라잡는다면, 알려 드리죠."

격구공이 두 사람 사이로 날아올랐다.

경기는 거칠고 빨랐다. 아비틴은 곧 알게 되었다. 이 나라의 격구는 손님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이 땅에 온 뒤 처음으로 그를 손님이 아니게 해 준다는 것을.

공주는 정확히 세 번 그의 공을 빼앗았고, 한 번은 일부러 빼앗기지 않았다. 겨루는 상대에 대한 예의가 어느 쪽인지, 아비틴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먼지가 가라앉은 격구장 끝에서, 늙은 향사 소이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소이는 그 소리를, 오래 기억해 두었다.

경기는 해가 기울도록 이어졌고, 끝났을 때 진 쪽은 아비틴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는 크게 웃었다. 체면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그 웃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왕자도 첫날부터 지는군요."

공주가 말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배우는 사람은, 진 것이 아닙니다."

그를 일으키는 손끝에서 옅은 향이 스쳤다. 볕에 마른 솔의 서늘한 숨과, 잘 익은 모과의 둥근 단내. 아비틴 쪽에서는 장미와 유향이 흘렀다. 두 향은 격구공이 그린 궤적 위에서 잠깐 스치고, 흩어졌다.

아직은, 스치기만 할 때였다.

공주가 웃었다. 그 웃음이—

천 년 뒤, 황남빵 가게 진열장 앞에서 웃음을 참는 프라랑의 얼굴과 겹쳤다.

정확히 말하면 프라랑은 아까부터 진열장 안쪽을 세 번째 곁눈질하는 중이었고, 자신이 그러는 줄 몰랐고, 도경만 알았다.

도경이 말없이 가게로 들어갔다 나왔다. 열 개들이 상자가 그녀 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뭐예요, 이게."

"아까부터 눈이 세 번 갔다 왔길래."

"제가요? 아닌데요."

"니 감정은 향보다 얼굴에 먼저 뜬다."

프라랑은 반박하려다가, 상자를 받았다. 받으면서 도경의 귀 끝이 아주 옅게 붉어진 것을 보았고, 못 본 척해 주었다.

"…이건 시향 사이 미각 리셋용이에요."

"그렇겠지예."

"연구용이라고요."

"세 개째 연구 중이시고."

따뜻한 팥의 단내가 밤공기에 섞였다. 휴전이란 대체로 이렇게, 별것 아닌 것으로 성립되었다.

"근데 이거, 열 개나 누가 다 먹어요."

"연구 열심히 하시믄 됩니더."

"…같이 먹어요. 공동 연구."

웃으며 골목을 돌아온 두 사람은, 메종 프라랑 앞에서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가게 앞에 낯선 실루엣이 서 있었다. 가로등 역광 속의 긴 코트 자락, 큼직한 여행 가방. 그리고 이 골목의 어떤 향과도 섞이려 들지 않는, 진하고 화려한 향.

프라랑의 코가 먼저 알아봤다. 저 배합. 저 과할 정도의 자신감. 기억 속의 어떤 실습실이 훅 당겨져 왔다.

설마.

실루엣이 홱 돌아서며 양팔을 벌렸다.

"Frarang! C'est moi!"

프라랑의 몸이 반가움과 불길함 사이에서 삐끗했다.

"카밀…? 네가 왜 경주에 있어?"

파리 시절의 동기, 카밀 아슈티아니는 무대 인사를 하듯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 골목이 다 듣도록 선언했다.

"굴 서라의 적통 후계자가 왔지."

프라랑 옆에서 도경이 팔짱을 꼈다. 카밀 쪽은 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두 귀가—이번에는 황남빵 때와 전혀 다른 이유로—붉어지고 있었다.


※ 일러두기 — 과거 파트의 격구 장면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에 전하는 폴로(격구) 모티프를 바탕으로, 공주를 능동적인 인물로 옮겨 재구성한 창작 변주입니다. 본 작품의 과거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아닌 설화적 상상에 기반합니다.



5화. 파리에서 온 남자


카밀은 인사를 포옹으로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양팔이 활짝 벌어지고, 코트 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이고—

제목: 황리단길에 극적으로 등장해 프라랑을 안으려는 카밀과 이를 지켜보는 도경 - 설명: 황리단길에 극적으로 등장해 프라랑을 안으려는 카밀과 이를 지켜보는 도경

프라랑이 시향지 한 장을 그의 코앞에 세웠다.

"거기까지."

"프라랑. 우리가 몇 년 만인데."

"반가운 척하기 전에, 목적부터."

"목적이라니, 상처다. 나의 목적은 늘 향과, 진실과—"

"자기 홍보요." 어느새 카메라를 켜 든 하늘이 문장을 대신 끝냈다.

카밀은 상처받은 표정을 정확히 일 초 반 유지한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매장으로 들어섰다. 도경이 그 동선 위에 향 상자를 하나 슬쩍 내려놓았다. 물리적인 바리케이드였다. 카밀은 그것을 우아하게 돌아 들어갔다.

"좋은 가게야. 향의 배치가 훌륭해. 다만 입구의 환영 인사가 좀 차갑군."

"환영한 적 없어."

매대 위의 침향이가 카밀의 코트 자락에 코를 대더니, 즉시 재채기를 하고 매장에서 제일 먼 자리로 이사했다.

"고양이가 나를 거부했어."

"쟤가 이 골목 향 감별사예요. 방금 불합격 나온 거고요."

카밀은 대답 대신, 들고 온 낡은 문서 케이스를 시향 바 위에 내려놓았다. 가죽 모서리가 닳아 반질거리는, 그의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오래된 물건이었다.

"소개하지." 카밀이 케이스에 손을 얹었다. "우리 가문에 전해 오는 페르시아 향 필사본—의, 사본."

케이스 겉면에는 여덟 갈래 꽃잎 문양이 박혀 있었다.

"쿠쉬나메라고 들어 봤나? 바다를 건너 신라까지 온 페르시아 왕자의 이야기. 그 왕자의 곁에 조향을 맡은 가문이 있었고—" 카밀이 제 가슴을 짚었다. "그 피가 여기까지 흘렀지. 그러니까 나야말로, 굴 서라의 계승자."

제목: 카밀 아슈티아니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 설명: 카밀 아슈티아니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족보 검증은요?" 하늘이 카메라 너머에서 물었다.

"낭만은 검증보다 빠르지."

"방금 그 말, '검증 안 됨'으로 자막 달릴 거예요."

프라랑의 시선은 그의 오른손에 가 있었다. 새끼손가락의 금빛 인장 반지. 여덟 잎의 로제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생각이 답보다 먼저 손목으로 내려갔다. 엄마의 낡은 리본. 그 매듭 장식의 짜임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같다고 하기엔 흐렸고, 다르다고 하기엔 자꾸 걸렸다.

"그 반지." 프라랑이 물었다. "가문 거야?"

"대대로." 카밀이 반지를 들어 보였다. "인장이야. 진짜 위에만 찍는."

하늘이 그 반지를 줌으로 당겨 찍으며 말했다. "문양 예쁘네요. 로고로 파셔도 되겠어요."

"가문의 것은 팔지 않아."

"방금 그 대사는 팔리겠는데요."

프라랑은 손목의 리본을 소매 안으로 반쯤 밀어 넣었다. 닮았다는 생각은, 확인되기 전까지 혼자만의 것으로 두기로 했다.

도경이 코를 한 번 움직였다.

"그건 그렇고." 그가 말했다. "필사본보다 본인 향이 더 진합니더. 지금."

다음 날 아침, 문향재 입구에는 밤사이 표지판이 늘어 있었다.

신발은 여기까지. 장갑 착용. 그리고 제일 굵은 글씨로—외부 향수 금지.

"이건 차별이야." 카밀이 항의했다.

"위생입니더." 도경은 향수를 덧뿌리려는 카밀의 손목을 정확히 낚아챘다. "향 분석하러 와서 향수를 이만큼 뿌리면 우짭니까. 샘플 다 오염됩니더."

"이건 나의 피부다."

"씻고 오이소."

"야만이야! 프라랑, 뭐라고 말 좀—"

"규정 준수는 기본이지." 프라랑은 이미 장갑을 끼고 있었다.

"너희 둘… 한편이 됐군."

"위생에는 편이 없어."

카밀은 배신감에 젖은 얼굴로, 손등에 남은 향수의 마지막 잔향을 아껴 맡으며 세면장으로 향했다. 걸음마다 은은하게 억울했다.

카밀이 씻으러 간 사이, 프라랑은 표지판을 마저 붙이는 도경을 곁눈으로 보았다. 위생을 말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옥타브 낮았고, 귀는 위생과 무관한 색으로 붉어 있었다.

질투를 위생으로 번역하는 사람이구나.

프라랑은 그 발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당분간은.

숙소 배정은 하늘의 관할이었다.

교촌마을의 한옥 게스트하우스. 카밀은 대문을 지나다 낮은 문틀에 이마를 부딪혔고, 하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얼음팩을 건넸다.

"제일 전망 좋은 방으로 부탁하지."

"전망 좋은 방, 있어요. 조건도 있고요." 하늘이 배정표를 넘겼다. "팔로워 80만이면 숙박비 0원. 대신 프로젝트 홍보 콘텐츠 3개."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

"상부상조라고 해 두죠."

카밀은 하늘을 오 초쯤 바라보다가, 이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 아주 무서운 매니저군."

"칭찬 감사합니다. 첫 라이브는 내일 월정교예요."

"조식은?"

"라이브 하나당 조식 이틀."

"…환전상이랑 협상하는 기분이군."

"숙박업은 원래 환대와 계산의 예술이에요." 하늘은 방 열쇠를 건네며 방긋 웃었다. "환영합니다, 카밀 씨. 콘텐츠가 되신 걸."

월정교의 해 질 녘, 카밀의 촬영은 삼백 장을 넘기고 있었다.

"왼쪽 얼굴은 역사, 오른쪽 얼굴은 미래."

"둘 다 마감은 오늘이에요." 짐벌을 든 하늘이 영혼 없이 답했다.

같은 포즈, 조금씩 다른 배경. 다리 난간에서, 다리 아래에서, 노을을 등지고, 노을을 마주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하늘은 그 인파를 놓치지 않고 예고 자막을 띄웠다. 천년의 향, 분석 시작.

프레임 구석에는 억지로 끌려 나온 프라랑과 도경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카메라 보는 법을 몰랐고, 그래서 조회수는 더 나왔다.

"두 분! 카밀 씨 양옆으로 반 발짝만 붙어 주세요!"

"이게 왜 필요합니까." / "이게 왜 필요해요?"

"합성 아니라는 증거요."

항의는 동시에 나왔고, 동시에 항의하는 그 장면이 그날 조회수 일 위가 되었다.

그날 밤, 아틀리에에는 처음으로 세 명의 조향사가 모였다.

프라랑의 분석 데이터. 도경의 전통 원료 대조표. 그리고 카밀이 외워 온 페르시아의 옛 향명들. 세 갈래의 지식이 삼각형처럼 테이블을 둘러쌌다.

"규칙 하나." 프라랑이 보드를 둘로 갈랐다. "추측은 따로, 측정값은 따로 써."

"나를 못 믿어?"

"그래서 기록하는 깁니더." 도경이 답했다.

하늘은 그 옆에서 모든 샘플의 이동을 촬영하고 있었다. 누가, 언제, 무엇을 만졌는지. "나중에 딴말 나오면 이 영상이 증인이에요."

신기한 밤이었다. 잘난 척하는 방식은 셋 다 달랐는데, 향 앞에서는 손발이 맞았다. 카밀이 옛 향명을 대면 도경이 대응할 만한 전통 향재를 꺼냈고, 프라랑이 그 사이에 측정값으로 다리를 놓았다. 하늘의 카메라만이 그 삼각형 바깥을 돌며, 세 사람이 스스로도 모르는 팀이 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이 향명은 뭐지?" 카밀이 옛 단어 하나를 짚었다.

"태운 수지 계열이겠네예. 이거랑 비슷할 낍니더." 도경이 봉지 하나를 열어 건넸다.

카밀이 코를 대고, 잠시 말을 잃었다. "…비슷한 게 아니라, 이거야. 할머니 서랍에서 나던 거."

세 사람은 각자의 도시에서 가져온 기억을 하나씩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다. 향 앞에서는, 국적보다 서랍이 가까웠다.

새벽 세 시, 하늘이 야식 라면을 돌렸다. 국물 냄새가 원료 냄새를 전부 덮어 버리는 바람에 삼십 분간 강제 휴식이 선포되었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새벽, 검색창은 같은 답만 반복했다.

일치 없음. 일치 없음. 일치 없음.

미지정 신호는 등록된 어떤 단일 천연 원료의 표준과도 맞지 않았다. 후보 목록에서 이름이 하나씩 지워졌다.

"라벤더 아니고. 몰약도 아니고. 계피 계열도 아니고." 카밀이 목록을 읽어 내려가다 앓는 소리를 냈다. "세상의 향료를 다 지우고 있어."

"지우는 것도 전진입니더." 도경이 말했다. "아닌 거를 알믄, 맞는 기 좁혀지니까예." 프라랑은 향낭의 비단 짜임을 확대 화면으로 오래 들여다보다가, 낮게 말했다.

"없는 원료가 아니라. 사라진 방식."

"그라믄." 도경이 고개를 들었다. "기록을 찾아야겠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카밀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카밀의 문서 케이스에.

카밀은 처음으로 과장 없이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사본 묶음이었다. 오래된 필체의 페르시아 문자. 그리고—문서 한가운데를 지나는, 찢겨 나간 단면.

"원본은 안전한 곳에 있어.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카밀의 목소리에서 무대가 빠졌다. "우리 가문이 가진 건, 정확히 절반이야."

"반쪽이 된 이유는?"

"몰라. 내가 물려받았을 때부터 이랬어." 카밀은 찢긴 자리를 손끝으로 짚었다. "할머니는 '나머지는 바다 건너에 있다'고만 하셨지. 어릴 땐 동화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천 년 됐다는 향낭이 실재하는 걸 봤잖아. 동화가, 아니었던 거지."

사본에는 장미와 유향 계열의 재료, 그것을 다루는 법이 적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문장이 바다 건너의 재료로 넘어가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종이는 끊겨 있었다.

"절반의 지도는 줄 수 있어. 나머지 길은, 함께 찾아."

프라랑은 찢긴 단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세월에 낡은 자리였지만, 우연히 찢어진 모양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가른 선이었다.

"핵심은 재료가 아니라." 그녀가 말했다. "잘려 나간, 다음 문장이야."

찢긴 단면이 조명 아래에서 날카로운 경계선을 그었다. 그 선 너머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일러두기 — 카밀의 혈통 주장은 인물 스스로의 믿음이며, 작품이 확정하는 사실이 아닙니다.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로 해석되는 '바실라')의 교류를 담은 실존 서사시이나, 등장 문서·가문·향 기록은 창작입니다.



6화. 잃어버린 원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는 길, 네 사람의 보폭은 제각각이었다.

앞장선 하늘은 동선표를 들고 반 박자 빨랐고, 카밀은 담장마다 멈춰 사진을 찍느라 반 박자 느렸다. 프라랑과 도경은 그 사이에서, 어느새 당연해진 나란한 속도로 걸었다.

전시실 유리 안에 옛 향로가 놓여 있었다.

프라랑은 향로의 다리와 몸통, 뚜껑의 구멍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유리 너머의 물건은 아무 향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형태가 말해 주는 것들이 있었다. 연기가 어느 높이로 피어올랐을지. 어떤 자리에 놓여 어떤 시간을 함께했을지. 이 도시에서 향이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과 의례의 도구였다는 것.

"천 년 전 사람들도." 프라랑이 유리에서 물러서며 말했다. "좋은 냄새 앞에서는 우리랑 똑같이 눈을 감았겠죠."

"그거는 안 변하지예." 도경이 답했다. "코는 유행을 안 탑니더."

하늘은 그 대화를 자막으로 받아 적으며 촬영 허용 표지를 한 번 더 확인했고, 카밀은 향로 앞에서 셀피를 시도하다 경비원과 눈이 마주쳐 조용히 물러났다.

제목: 경주의 유산 조사 공간에서 향로와 기록을 살피는 프라랑 팀 - 설명: 경주의 유산 조사 공간에서 향로와 기록을 살피는 프라랑 팀

"레시피가 적혀 있을 리는 없겠지." 카밀이 유리에 바짝 붙어 아쉬워했다.

"유물은 답안지가 아니라." 도경이 말했다. "질문을 제대로 하게 해 줍니더."

로비로 나오던 하늘이 게시판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향토사 강연 포스터였다. 서라벌과 바닷길, 그리고 페르시아.

강연실의 슬라이드에는 문장마다 '가설'과 '추정'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강연자는 『쿠쉬나메』 속 '바실라'를 신라로 보는 해석과, 그곳의 왕 타이후르를 태종 무열왕에 대응시키는 시각, 그리고 페르시아 왕자와 혼인했다는 공주의 이야기를 차례로 소개했다. 그리고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

"다만—국내의 정사에서, 해당 공주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매혹적인 가설이지만, 기록의 빈칸을 사실로 채워선 안 됩니다."

카밀의 손이 반론을 위해 올라가려는 것을, 하늘이 옆에서 조용히 눌러 내렸다.

프라랑은 필기하던 손을 멈췄다.

빈칸.

그 단어가, 어젯밤 필사본의 찢긴 단면과 정확히 겹쳐졌다.

강연이 끝난 뒤 프라랑은 강연자에게 다가가, 옛 향 문화를 더 알 수 있는 자료를 물었다. 강연자는 문헌 몇 가지를 적어 주고는 덧붙였다.

"복원을 하신다고요. 그럼 부탁 하나만 드리지요. '이것이 진짜 천년 전의 향이다'—라고는, 부디 쓰지 말아 주세요."

"안 씁니다." 프라랑은 그 자리에서 약속했다. "저희가 만드는 건 오늘의 대답이지, 그날의 정답이 아니니까요."

강연이 끝난 뒤, 박물관 카페의 열람 테이블에서 하늘이 화이트보드를 세 칸으로 나눴다.

페르시아의 기록. 신라 쪽 가설. 가문의 구전.

각자 아는 것을 포스트잇으로 붙여 나갔다. 세 열은 곳곳에서 서로를 가리켰지만, 어느 한 줄도 다른 줄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겹치는 것은 향의 재료들, 그리고 '서라벌의 꽃'이라는 이름뿐이었다.

"결정하자." 프라랑이 마커를 내려놓았다. "우리가 만드는 건 역사 재현품이 아니야. 진짜처럼 꾸미는 게 아니라—모르는 부분을, 모른다고 쓰자."

"설화 기반 창작 복원." 하늘이 받아 적었다. "제출 서류에도 이렇게 갑니다."

"그게 오래 가는 방식이지예." 도경이 동의했다.

카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낭만이 좀 줄지만… 거짓말보다는 낫지."

"대신 조건이 있어." 그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설화'라는 단어는 내가 발음한다. 프랑스어 억양으로 하면 훨씬 신비로우니까."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하늘이 보드 사진을 찍어 팀 채팅방에 올렸다. 채팅방 이름은 어느새 '천년향 TF'로 바뀌어 있었다.

정리를 맡은 도경이 열람대의 향토 자료집을 넘기다가, 어느 대목에서 손을 멈췄다. 바다 건너에서 온 손님들이, 끝내 손님으로만 남지 않았던 옛이야기였다.

◆ 서라벌의 깃발 — 그 맹세보다 몇 해 전, 두 번째 이야기

제목: 바다 건너온 왕자 아비틴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 설명: 바다 건너온 왕자 아비틴의 앞, 옆, 뒤 모습과 얼굴 표정 캐릭터 시트

위기는 바다 쪽에서 왔다.

낯선 배들이 물길을 위협했을 때, 타이후르 왕은 아비틴을 불렀다. 왕의 물음은 손님에게 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머무는 손님이 아니라, 함께 지킬 벗으로 묻겠소."

아비틴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서겠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이들은 익숙한 항해술과 낯선 무예를 내놓았고, 서라벌은 배와 물자와 길을 내놓았다. 같은 지도 위에 두 언어의 손가락이 나란히 놓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리에서는 손이 통했다. 매듭 하나, 물길 하나, 바람의 방향 하나. 서로의 목숨을 맡기는 데 필요한 말은, 생각보다 적었다.

공주는 칼 대신 향을 맡았다. 배웅하는 의례의 향을 준비하고, 돌아온 배에 밴 상한 냄새를 걷어 내고, 다친 이들의 침상 곁에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향을 두었다. 전쟁의 대부분은 칼이 아니라 그런 일들로 지탱된다는 것을, 향사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승패는 길게 적을 것이 없다. 깃발은 지켜졌고, 배들은 돌아왔다.

그리고 승리의 잔치가 걷힌 자리에, 혼례의 천막이 올라갔다.

월성의 뜰. 승전 뒤의 봄이었다.

아비틴이 혼인을 청했을 때, 타이후르 왕은 신하들을 보지 않고 딸을 보았다.

공주가 앞으로 나섰다. 왕이 묻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제가 택한 길입니다."

아비틴이 그 곁에 서서 답했다.

"그 길을, 제 운명이라 부르겠습니다."

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되었다.

혼례를 앞둔 궁중 향사에서, 소이가 향 목록을 펼쳤다.

장미. 유향. 침향. 모과. 솔. 바다 저편의 두 재료와 이 땅의 세 재료가, 한 소반 위에 처음으로 나란히 놓였다.

"두 집의 향을, 한 향으로 묶을 겁니다." 공주가 말했다.

소이는 오래 소반을 내려다보았다.

"쉽지 않습니다, 마마. 다른 향은, 서로를 이기려 듭니다."

"그러니." 공주가 향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기지 않는 순서를, 찾을 겁니다."

그 뒤로 향사의 일은 계절을 넘겼다. 향목을 자르고, 빻고, 수지와 가루를 섞고, 기름에 우리고, 볕과 그늘을 번갈아 지나게 했다. 어떤 것은 먼저 넣었고, 어떤 것은 오래 기다렸다가 넣었다. 무엇을, 얼마나, 어떤 차례로—그 답은 소이와 공주, 두 사람의 손에만 남았다.

실패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서로를 밀어내고, 삼키고, 흐려지는 냄새들. 그러나 어느 새벽, 향사의 문을 연 궁인이 걸음을 멈췄다. 다섯이 다투지 않고 하나로 서 있는, 처음 맡는 향이 방 안에 고여 있었다.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 향을, 꽃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기록도 남겼다. 다만 그 기록이 먼 훗날 어떻게 나뉘고 흩어질지는, 두 사람도 알지 못했다.

"장미. 유향." 천 년 뒤, 박물관 야외 벤치에서 카밀이 사본의 단어들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꽃을 연기로 묶는다.'"

"묶는다?" 하늘이 되물었다.

"은유겠지. 우리 쪽 절반은 여기까지야. 재료의 이름과, 시적인 문장 몇 줄." 카밀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반쪽은 출발점이지, 정답이 아니야."

"오늘 처음으로 겸손한 말 하셨어요."

벤치 위에 세 장의 종이가 겹쳐 놓였다. 카밀의 번역 메모, 프라랑의 분석표, 도경의 원료 목록. 장미와 유향의 자리는 채워졌다. 그러나 침향과 모과와 솔—이 땅의 재료를 다루는 법과 차례가 들어가야 할 자리는, 나란히 비어 있었다.

"결국 지도의 반은 여기 있고." 프라랑이 그 빈자리를 짚었다. "나머지 반은—우리가 어젯밤까지 이름도 못 붙이던, 그 신호 속에 있는 거네."

"양쪽 다 반쪽이라." 도경이 낮게 말했다. "맞춰 보라꼬 생긴 모양이네예."

그때, 프라랑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Papa였다.

프라랑은 정원 쪽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가 전화를 받았다.

"보랑." 아버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수화기 너머에서 지베르니의 저녁이 함께 건너왔다. "아틀리에를 정리하다가… 네 엄마 물건을 찾았어."

"…무슨 물건이요?"

"노트. 끝내지 못한 조향 노트하고, 오래된 원료 기록. 보랑, 네 엄마가 끝내지 못한 향이 있어. 한 번, 오지 않을래?"

프라랑은 잠깐 눈을 감았다. 지베르니. 엄마의 정원. 십오 년 동안 반쯤만 닫아 두었던 문.

아버지와의 통화는 늘 이랬다. 서로를 아끼는데, 두 사람의 문장 사이에는 언제나 엄마가 서 있었다. 그래서 말이 짧아지고, 조심스러워지고, 끝내 하지 못한 말은 다음 통화로 밀렸다.

이번에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침묵을 아버지가 오해하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갈게요. 그런데 아빠—혼자 말고, 같이 갈게요."

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세 사람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도경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하늘은 벌써 항공권 검색창을 열고 있었고, 카밀은 "지베르니? 봉 부아야주—" 하다가 하늘의 눈빛에 조용해졌다.

"출발 준비는 제가 짤게요." 하늘이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대표님은 짐만 챙기세요. …마음도요."

마음도. 프라랑은 그 말을 곱씹으며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경주의 노을과 지베르니의 노을은 같은 해가 만드는 것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먼 곳처럼 느껴질까.

그리고 그 시각, 지베르니의 아틀리에에서는.

앙리 오베르가 서랍 속 노트를 꺼내 먼지를 닦고 있었다. 낡은 표지를 열자, 안쪽 면에 아내의 손글씨가 남아 있었다.

작고 또렷한, 물음표 하나와 함께.

Gul-Sora?


※ 일러두기 — 과거 파트의 연합과 혼인 이야기는 『쿠쉬나메』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 창작 변주이며, 실제 7세기 신라의 역사로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 '무열왕의 공주'에 관한 내용 또한 일부 연구의 가설 소개로, 정사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7화. 지베르니의 정원


샤를 드골 공항의 입국장에서, 팀의 서열은 조용히 뒤집혔다.

경주에서 그렇게 능숙하던 도경이 표지판 앞에서 멈춰 섰고, 뭐든 척척 해내던 하늘이 자동 개찰구 앞에서 두 번 튕겨 나왔다. 카밀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셀피를 찍느라 바빴다.

"카밀 씨, 프랑스 사람이잖아요. 안내 좀—"

"파리지앵은 공항에서 길을 묻지 않아. 방황할 뿐이지."

"그게 길 잃었다는 뜻이잖아요."

"이쪽이에요. 짐은 저기서 찾고, 기차는 저 아래."

프라랑이 앞장섰다. 표지판을 읽고, 창구 직원과 웃으며 몇 마디를 주고받고, 네 사람 몫의 표를 한 번에 끊었다. 프랑스어가 그녀의 입에서 물처럼 흘렀다.

"여 오니." 도경이 캐리어를 끌며 말했다. "니가 말이 두 배로 빨라지네."

"내 세계에 온 걸 환영해요."

창밖 풍경이 무채색의 공항에서 초록의 시골로 바뀌어 갔다. 지베르니가 가까워질수록 담장마다 꽃이 늘었다. 프라랑은 창에 이마를 붙이고 그 변화를 지켜보았다. 열 살까지의 세계가, 한 정거장씩 되돌아오고 있었다.

제목: 지베르니 수련 연못 곁을 걷는 프라랑과 아버지 앙리 - 설명: 지베르니 수련 연못 곁을 걷는 프라랑과 아버지 앙리

"열 살까지 여기 살았어요." 그녀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엄마가 떠난 뒤에 파리로 갔고요. 아빠는 남았어요. 엄마의 정원 옆에."

아무도 뭐라 답하지 않았다. 답 대신, 하늘이 조용히 카메라를 내렸다.

마을 끝의 오래된 아틀리에 앞에서, 문이 먼저 열렸다.

앙리 오베르는 문간에 서서 딸을 보았다. 부녀는 두 걸음 거리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포옹해야 할지 악수해야 할지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결국 앙리가 팔을 벌렸고, 프라랑이 짧게 안겼다가 물러났다. 십오 년 치의 말이 그 삼 초 안에 다 들어가지는 못했다.

"네가, 사람들을 데려왔구나." 앙리가 일행을 보며 말했다.

"향 때문에요."

"사람 때문에 온 얼굴인데."

프라랑이 대답을 못 찾는 사이, 앙리는 손님들을 안으로 들였다. 도경과 악수를 나누던 그의 눈이 잠깐 아래로 향했다. 굳은살과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는 손. 앙리는 그 손을 조금 오래 쥐었다.

"장인의 손이군요."

"…아직 배우는 손입니더."

"배우는 손이 제일 좋은 손이지요. 다 배운 손은 게을러지거든."

앙리는 하늘의 장비 가방을 보고는 콘센트 위치를, 카밀의 브로치를 보고는 그것을 만든 파리 공방의 이름을 정확히 짚었다. 사람을 읽는 눈이 딸과 같은 종류였다. 다만 훨씬 지쳐 있고, 훨씬 다정했다.

아틀리에 안은 나무와 오래된 종이의 냄새로 차 있었다. 수십 년 치의 작업이 벽마다 배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낮고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앙리가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이리 오렴. 보여 줄 게 있다."

보관실의 서랍장은 잠겨 있었다.

열쇠가 돌아가자, 라벨이 바랜 병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김서혜의 글씨였다. 채취지와 날짜가 불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적힌, 꼼꼼하고 둥근 글씨.

제목: 지베르니의 오래된 조향 아틀리에에서 어머니의 노트를 발견한 프라랑과 도경 - 설명: 지베르니의 오래된 조향 아틀리에에서 어머니의 노트를 발견한 프라랑과 도경

"엄마가 모은 원료들이야. 손대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

프라랑은 장갑부터 꼈다. 도경은 말없이 병마개의 상태를 하나씩 확인했고, 하늘은 선반 전체를 영상으로 기록했다. 아무도 함부로 뚜껑을 열지 않았다. 십오 년을 기다린 것들에게는, 그만한 예의가 필요했다.

"이 병은 라벨이 두 번 덧붙여졌네예." 도경이 병 하나를 조명에 비춰 보았다. "같은 원료를, 시간 차를 두고 두 번 담았습니더."

"숙성 비교." 프라랑이 알아들었다. "같은 재료의 시간을 비교하고 있었던 거예요."

재료보다 시간이 레시피다—대릉원의 밤에 두 사람이 나눴던 가설이, 십오 년 전의 서랍 안에서 먼저 실험되고 있었다.

프라랑은 병을 살며시 제자리에 놓았다.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의 발자국을 십오 년 뒤에 밟는 기분은, 외롭고 또 든든했다. 두 감정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 방에서 처음 배웠다.

"엄마가 멈춘 자리에." 프라랑이 병 하나의 라벨을 손끝으로 짚었다. "내가 서 있네."

"멈춘 게 아니라." 도경이 옆에서 말했다. "남겨 둔 걸 수도 있고."

큰 테이블 위에 노트가 펼쳐졌다.

프랑스어와 한국어가 줄마다 섞여 있었다. 프라랑이 불어를 옮기고, 카밀이 군데군데 적힌 페르시아 표기를 대조하고, 도경이 여백의 공정 기호들을 읽었다. 세 사람의 손가락이 같은 페이지 위를 오갔다.

노트가 말해 주는 것은 분명했다. 김서혜도, 굴 서라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페이지에서, 팀이 며칠 밤을 갈아 넣은 가설이 이미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름 없는 신호. 모과와 침향. 그 두 계열의 특정한 전처리가 만나며 생기는 복합향이라는 후보까지—엄마는 도달해 있었다. 다만 그 순서와 비율이 들어가야 할 자리는, 여기서도 비어 있었다.

"엄마도 여기서 멈췄어."

"아니." 카밀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보다 한 칸 앞이야. 우리가 사흘 걸린 걸, 이분은 먼저 와 계셨잖아."

노트 갈피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수련이 가득한 연못. 뒷면에 짧은 메모가 있었다. 답이 막히면, 정원을 걸을 것.

지베르니의 정원은 늦은 오후의 빛으로 가득했다.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하늘은 수련 연못 앞에 카메라를 세웠고, 카밀은 지나가는 관람객들에게 꽃 이름을 과장되게 설명하다가 정원 직원에게 두 번 정정당했다.

제목: 꽃이 가득한 지베르니 정원에서 노트와 표본을 조사하는 네 사람 - 설명: 꽃이 가득한 지베르니 정원에서 노트와 표본을 조사하는 네 사람

"향도 그림처럼요." 하늘이 수면을 찍으며 말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면 안 돼요?"

"다르되." 카밀이 방금 정정당한 사람답지 않게 근엄히 답했다. "조향사는 정확해야 하지."

"방금 그 꽃 이름, 틀리셨잖아요."

"…꽃에게는 미안하게 됐군."

연못가의 도경은 오래 말이 없었다. 물 위의 빛과 그림자를 번갈아 보다가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하늘이 슬쩍 넘겨다보니 배합 메모가 아니라 단어 하나였다. 물그림자. 그는 가끔, 시인의 방식으로 메모하는 장인이었다.

프라랑은 꽃 아치가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생각을 정리할 참이었다. 엄마의 노트, 비어 있는 자리, 남겨 둔 것과 멈춘 것의 차이. 걷다 보니 길이 갈라졌고, 또 갈라졌고—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꽃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프라랑!" 어색한 억양의 부름. 그리고 낮게 이어지는 혼잣말. "…어디 갔노."

프라랑은 웃음을 눌러 삼키고 아치를 돌아 나갔다.

"여기요. 근데 내가 아니라, 당신이 길 잃었죠?"

"같은 말 아입니까."

"전혀 다른 말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방금 서로의 목소리에서 태연함보다 먼저 튀어나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둘은 그것을 모르는 척하기로 하고, 나란히 연못 쪽으로 걸었다. 수면 위에 두 사람의 반영이 흔들리며 겹쳤다가, 떨어졌다.

"아까, 와 대답 안 하고 웃었습니까."

"목소리가 먼저 반가워서요. 대답보다."

"……"

"농담이에요. 가요, 다들 기다리겠다."

농담이라고 했지만, 도경의 귀는 그 말을 농담으로 처리하지 못한 채 한동안 붉었다.

저녁 식탁은 아틀리에 뒤뜰에 차려졌다.

앙리는 요리 솜씨가 좋았고, 이야기 솜씨는 더 좋았다. 김서혜와 처음 만난 향료 시장, 신혼의 실패작들, 프라랑이 세 살에 향수병을 통째로 엎은 사건. 하늘은 웃느라 촬영을 세 번 멈췄다.

"세 살짜리가 향수병을 엎어 놓고는, 울지도 않고 바닥에 코부터 대더군요." 앙리가 말했다. "그때 알았죠. 아, 이 아이는 이쪽이구나."

"기억 안 나요, 그건."

"기억은 안 나도, 그 바닥 냄새는 알걸."

프라랑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접시가 비어 갈 무렵, 앙리가 노트를 프라랑 쪽으로 밀었다.

"네 엄마는 늘 말했지. 향은, 그리움의 언어라고."

"……."

"네 이름을 지을 때도 그 옛이야기를 했어. 서라벌의 향, 바다를 건넌 약속. 언젠가 너한테 직접 들려주고 싶어 했다."

프라랑은 노트 표지에 손을 얹었다. 안쪽 어딘가에 적혀 있을 물음표까지,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이건…."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엄마가, 아직 하고 있는 말이네."

식탁의 촛불이 낮게 흔들렸다. 앙리가 잔을 들었고, 하늘은 카메라 대신 잔을 들었고, 카밀은 긴 건배사를 준비하다 하늘의 눈짓에 짧게 줄였다.

"서혜를 위하여."

다섯 개의 잔이 조용히 부딪혔다.

밤이 깊어 손님들이 방으로 흩어진 뒤, 앙리가 프라랑을 잠깐 불러 세웠다.

"참, 말해 둘 게 있다. 어제 메종 오델리크에서 연락이 왔어. 네가 프랑스에 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만나고 싶다더구나."

프라랑의 옛방은 열 살의 크기 그대로였다.

책상 위에는 엄마의 노트. 그 옆에는 방금 열어 본 메일. 발신인은 메종 오델리크, 제목은 단정한 영어 한 줄이었다.

A conversation about your return.

당신의 복귀에 관한 대화.

내 자리를 돌려주려는 걸까. 아니면—다시 빼앗으려는 걸까.

프라랑은 답장 창을 열었다 닫기를 세 번 반복했다. 창밖의 지베르니는 완전한 어둠이었고, 방 안에는 노트의 오래된 종이 냄새와 모니터의 서늘한 빛만 있었다.

팔 년을 일한 곳이었다. 이름을 지운 곳이기도 했다. 두 사실은 서로를 지우지 못한 채 한 건물에 살았다. 만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절반만 나왔다. 사과—그리고 그다음은, 비어 있었다.

수락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오래 멈춰 있었다.

그리고 눌렀다.

문밖 복도에서, 물을 가지러 나왔던 발소리 하나가 그녀의 방 앞에서 잠깐 멎었다가—그냥 지나갔다.


8화. 파리의 밤, 서라벌의 밤


지베르니에서 파리로 가는 아침 열차는 조용했다.

프라랑은 어젯밤의 메일에 대해 '자료 확인을 위한 면담'이라고만 설명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부도 아니었지만.

"알겠심더." 도경은 짧게 수긍했고, 그 뒤로 창밖만 보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유리창의 반사광이 지나갔다. 맞은편의 하늘과 카밀이 눈치를 주고받았다.

"끝나고 다 같이 저녁 어때요?" 하늘이 공기를 바꿔 보려 했다.

"나는 숙소 먼저 가겠심더."

공기는 바뀌지 않았다.

카밀이 화제를 두 번 던졌다. 파리의 새 전시. 유명하다는 빵집. 두 번 다 짧은 대답 뒤에 가라앉았다. 결국 그는 하늘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저 둘, 지금 무슨 사이지?"

"프로젝트요." 하늘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서 제일 좁고 추운 단어요."

메종 오델리크 본사의 유리문은 팔 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로비의 복도. 여덟 달 전, 상자를 안고 걸어 나왔던 바로 그 복도를 프라랑은 이번엔 중앙으로 걸었다. 진열장에는 하우스의 역대 향수들이 연대순으로 놓여 있었다. 그 끝쪽, 가장 밝은 조명 아래—그녀가 만든 향이 있었다. 병 아래 명판에는 하우스의 이름만 새겨져 있었다.

도경이 그 명판과 프라랑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직원 몇이 프라랑을 알아보고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것도, 그는 보았다.

한 젊은 직원만이 다가와 작게 인사했다. "선생님 향, 아직 제일 좋아해요." 프라랑이 답하기도 전에 직원은 상사의 눈길에 총총 사라졌다. 이 건물에서 그녀의 이름은, 그렇게 소곤거림으로만 살아 있었다.

"여가." 그가 낮게 물었다. "니 향 가져간 데가."

"오늘은, 자료만 가져갈 거예요."

안내 직원이 회의실 문을 열었다. 관계자 외 출입이 제한된다는 정중한 설명과 함께, 문은 프라랑만 삼키고 닫혔다.

도경은 복도에 남았다.

회의실 안에는 계약서가 먼저 앉아 있었다.

테이블 중앙의 서류철. 그 표지 위의 직함이 프라랑의 눈에 박혔다.

Head Perfumer. 수석 조향사.

"지난 일은." 맞은편의 임원이 말을 골랐다. "조직의 오류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크레딧 누락, 성과의 귀속, 그리고 해고까지—오류. 여덟 달의 밤과 그녀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를, 그 두 글자가 대신했다.

"수석 조향사로 돌아와 주십시오. 연구 지원은 원하는 만큼. 그리고—이번에는 당신 이름으로 출시합니다."

프라랑은 서류철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목숨처럼 원했던 문장이, 팔 년 늦게 도착해 있었다.

"연구 주제도 자유입니다. 지금 하시는… 한국 프로젝트요. 하우스 산하로 가져오시면 예산 규모부터 달라질 겁니다."

"그건 제 것만이 아니라서요."

"파트너십 조건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임원은 준비된 답이 많은 사람이었다. 팔 년 전에는, 아무 답도 준비하지 않았던 조직이.

"이번에는, 이라는 말이." 그녀가 말했다. "늦었네요."

"보상하겠습니다. 대답은 언제 주시겠습니까?"

복도의 도경에게는, 문틈으로 몇 개의 단어만 건너왔다. 당신 이름으로. 돌아오면. 수석. 단어들은 문에 걸러져 앞뒤를 잃은 채였고, 그래서 더 크게 들렸다.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프라랑의 다음 말은, 마침 닫힌 안쪽 문소리에 잘려 도경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남은 말을 기다리는 대신에.

대기 소파의 하늘과 카밀에게, 그는 먼저 나가 있겠다고만 말했다. "회의 안 끝났는데요?" 하늘이 물었지만 그는 이미 유리문을 밀고 있었다.

"…뭔가 들으셨나 본데." 하늘이 중얼거렸다.

"절반만 들었겠지." 카밀이 드물게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원래 문이란 건, 나쁜 절반만 통과시키거든."

◆ 혼인의 밤 — 서라벌

제목: 칠 세기 서라벌의 혼인 등불 아래 향합을 함께 드는 프라랑 공주와 아비틴 - 설명: 칠 세기 서라벌의 혼인 등불 아래 향합을 함께 드는 프라랑 공주와 아비틴

혼례의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야, 방은 두 사람의 것이 되었다.

혼례는 두 방식으로 두 번 치러졌다. 이 땅의 예법으로 한 번, 바다 건너의 예법으로 한 번. 두 번째 절차를 아는 이가 신랑 쪽 사람들뿐이라 하객들은 처음 보는 의례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낯섦이 무례가 되지 않는 자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혼례였다.

잔치의 마지막 순서로, 공주는 하객들에게 작은 향낭을 하나씩 나누게 했다. 소이의 향사가 몇 밤을 새워 지은 것들이었다. 향을 나누어 혼인을 알리는 법은 어느 예법에도 없었으므로—그날부터, 서라벌의 새 예법이 되었다.

등불 아래에서 프라랑 공주는 작은 향합을 열었다. 계절을 넘겨 완성을 향해 가던 향—소이와 함께 다투는 냄새들에게 이기지 않는 순서를 가르쳐 온, 그 향이었다.

아비틴이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사막의 장미와 성전의 유향이 있었다. 그 아래로, 이 땅의 나무와 열매와 솔이 그것들을 받치고 있었다. 어느 쪽도 이기지 않았다. 어느 쪽도 지지 않았다.

"신기하군요." 아비틴이 말했다. "고향을 떠나온 뒤로, 두 개의 냄새가 늘 다투었습니다. 두고 온 것과, 새로 만난 것이. 그런데 이 향 안에서는—"

"다투지 않지요." 공주가 받았다. "순서를 지키니까요. 사람도 그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름을 지었습니다." 공주가 말했다. "당신의 말로 꽃—굴. 내 고향의 옛 이름으로, 서라."

"굴 서라." 아비틴이 그 소리를 혀 위에 굴렸다. "그럼, 우리 둘의 이름이군요."

"아직 미완입니다. 중심에 넣을 마지막 하나를 찾지 못했어요."

"평생 찾으면 되지요. 시간은 많으니."

그렇게 말한 아비틴의 얼굴에, 등불이 흔들리며 그늘 하나를 얹었다.

공주는 그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말하세요."

아비틴은 오래 침묵하다가, 창밖의 달을 보았다.

"내가, 돌아가야 할 나라가 있습니다."

빼앗긴 조국. 그것을 되찾는 일이 제 어깨에 지워진 운명이라는 것. 언제가 될지 모르나, 그날이 오면 바다를 되건너야 한다는 것.

방 안의 침묵이 길었다. 공주는 배신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등불 심지를 돋우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 말을 오늘에야 하는 것은, 늦었습니다."

"…압니다."

"그래도." 공주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갈지, 말지는—함께 정합시다. 내 몫의 선택을, 당신이 대신 내리지 마세요."

아비틴은 그 밤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말이 부끄러워졌다. 홀로 짊어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함께 짊어지자는 사람 앞에서, 그 생각은 초라해졌다.

"약속하지요." 그가 말했다. "떠나는 날이 온다면—그날의 문장은, 둘이서 씁니다."

창살 사이의 달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 달이—

천 년 뒤, 파리의 호텔 창에도 떠 있었다.

프라랑은 로비와 방을 오가며 세 번 전화를 걸었다. 도경은 받지 않았다. 네 번째에는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저예요. …결정한 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우리 프로젝트부터—"

말은 거기서 잠깐 끊겼다가, 조금 작아진 채 이어졌다.

"끝나고 얘기해요. 직접."

같은 시각,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도경은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창밖의 파리가 젖은 빛으로 흘러갔다. 문향재 임대인에게서 온 메시지가 핑계라면 핑계였고, 사실이라면 사실이었다.

제목: 비 내리는 파리 터미널 창가에 서류철을 안고 홀로 선 프라랑과 멀어지는 차 - 설명: 비 내리는 파리 터미널 창가에 서류철을 안고 홀로 선 프라랑과 멀어지는 차

우리 프로젝트부터.

우리라 카는 게, 언제까지고.

그는 그 생각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공항 라운지에서 그는 임대인에게 회신을 보냈고, 할아버지의 요양 병원에 면회 일정을 물었고, 밀린 주문 목록을 확인했다. 해야 할 일은 많았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이, 그 밤의 그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탑승 안내가 나올 때까지 그는 분석 자료를 열지 않았다. 화면 대신 창밖만 보고 있는 옆얼굴을, 라운지의 어두운 유리가 흐리게 되비추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도경의 방은 비어 있었다.

침대는 쓴 적 없는 것처럼 정돈되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 호텔 메모지 한 장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먼저 간다. 문향재 일 때문에. 경주서 보자.

프라랑은 그 열넉 자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서운함이 목까지 차올랐고, 그녀는 그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눌렀다. 화를 내는 쪽이, 우는 쪽보다 쉬웠다.

조식 자리에서 하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일정대로 가자."

괜찮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고, 일정대로 가자는 말은 사실이었다. 프라랑은 후자에 매달리기로 했다.

공항으로 가는 차에서, 카밀이 창밖을 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파리는 좋은 도시야. 그런데 그 친구는—파리에 있는 내내, 경주 시간으로 살더라."

"…무슨 뜻이야?"

"밥때마다 일곱 시간을 더하던데. 지금 문향재는 몇 시겠다, 하는 얼굴로."

프라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많은 것을 대답한 셈이 되었다.

"사적 대화 금지." 그녀가 메모지를 접으며 말했다. "잘 지키네."

곁에서 카밀은 아무 농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프라랑의 캐리어를 끌어 주었고, 하늘은 귀국 편 좌석을 조용히 다시 배치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창가 자리의 도경은 구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희고 끝없는 물결이 천 년 전의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아득한 끝에서, 아주 작은 등불 하나가 켜지는 것을—본 것 같았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가가 잠깐 뜨거웠다. 그는 그것을 삼켰다.


※ 일러두기 — 과거 파트의 혼인과 이별의 갈등은 『쿠쉬나메』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 창작 변주이며,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9화. 라뮤의 제안


귀국 다음 날, 황리단길의 담장은 평소보다 높아 보였다.

프라랑은 메종에서 짐을 풀었고, 도경은 문향재에서 짐을 풀었다. 두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담장 위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필요한 대화는 있었다. 다만 전부 프로젝트 얘기였다. 샘플 상태 확인 부탁해요. 확인했심더. 분석 일정 공유합니다. 봤심더.

하늘이 일정표를 들고 두 집 사이를 세 번 왕복하다가, 결국 담장 앞에 서서 양쪽에 다 들리게 말했다.

"사적 대화 금지 조항—지금 와서 너무 잘 지키시네요."

양쪽 다 대답이 없었다. 카밀조차 평소와 달리 중재에 나서지 않고, 게스트하우스 마루에서 묵묵히 데이터만 정리했다. 농담이 사라진 카밀은 낯설게 유능했고, 그래서 더 불길했다.

백령만이 평소와 같았다. 안채 마루에서 두 집의 냉기를 한참 건너다보던 그녀는, 저녁상의 국을 두 그릇 퍼서 하나를 담장 너머로 보냈다.

"싸움 구경은 원래 밥 묵고 하는 기다."

"싸움 아이라예, 할매." 담 너머에서 대답이 왔다.

"그라믄 화해 구경이가?"

대답이 없었다. 백령은 그 침묵을 빈 국그릇과 함께 접수했다.

그 냉기 속으로, 서울에서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성수동 K-향 페어. 천년향 프로젝트의 중간 공개 부스였다.

성수동의 행사장은 유광 금속과 네온의 숲이었다.

그 숲 한가운데, 하늘이 고집해서 세운 작은 목재 시향대가 있었다. 낡은 기와 한 장과 삼베 한 폭. 화려한 부스들 사이에서 그 수수함은 오히려 눈에 띄었다.

공개하는 것은 복원의 중간 결과까지였다. 다섯 원료의 방향과 접근법. 향낭 원물과 미확정 레시피는 꺼내지 않는다—출발 전 팀이 합의한 유일한 안건이었고, 그 회의조차 5분 만에 끝났다. 요즘 두 사람의 대화는 효율적이었다. 슬플 만큼.

부스 준비도 그 효율로 끝났다. 동선 하나 겹치지 않았고, 물건 하나를 두 번 옮기지 않았다. 손발이 이렇게 맞는 두 사람이 말만 안 하고 있다는 사실에, 하늘은 조금 화가 났다.

관람객은 끊이지 않았다. 프라랑은 시향대의 왼쪽에서, 도경은 오른쪽에서, 서로 등을 진 채 각자의 언어로 설명했다.

"두 분이 같이 만든 거예요?" 한 관람객이 물었다.

"아직요." / "아직입니더."

대답만은, 얄밉게도 동시에 나왔다.

"두 분 케미가 부스 콘텐츠네요." 관람객이 웃으며 시향지를 받아 갔다.

케미. 하늘은 그 단어를 오늘만 열두 번 들었고, 들을 때마다 당사자들의 등이 서로에게서 일 도씩 더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시향대 위의 향은 정직했다. 다섯 원료가 차례를 기다리다 중심의 한 지점에서 멈추는, 미완의 향. 사람들은 그 빈 중심에 저마다의 기억을 밀어 넣었다. 할머니의 장롱. 군대 가던 날의 새벽. 첫 아이의 배냇저고리. 하늘은 방명록에 쌓이는 문장들을 읽으며, 이 프로젝트가 이미 팀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실감했다.

인파가 잠깐 갈라진 오후, 잘 닦인 구두 한 켤레가 시향대 앞에 멈췄다.

군더더기 없는 수트. 표정을 아끼는 얼굴. 여자는 시향지를 들어 정확히 세 번에 나누어 향을 확인했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프라랑은 그 동작만으로 알았다. 업계 사람. 그것도, 아주 위쪽의.

"원료 다섯 중 셋이 국산 수급이군요. 단가가 흔들릴 텐데, 산지 계약은 하셨어요?"

"…아직요."

"시향지 회수율은요? 부스 체류 시간은 재고 계세요?"

질문마다 급소였다. 답을 듣기 전에 이미 답을 아는 얼굴이었다.

"미완성이네요." 여자가 말했다. 평가가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미 자기 기억을 붙이고 있어요. 방금 앞의 관람객은 할머니 얘기를 했고, 그전 사람은 첫사랑 얘기를 했죠."

여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라뮤 코리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진세라.

"사업이 됩니다. 삼십 분만 주시죠."

라뮤의 성수 미팅룸은 팀의 시향대와 정반대의 세계였다.

대형 화면에 제안서 표지가 떠 있었다. Global K-Heritage Line.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숫자가 커졌다. 글로벌 유통망, 생산 규모, 마케팅 예산, 법무 지원.

화면 속 가상 매대에는 같은 병이 수백 개씩 도열해 있었다. 병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수백 개가 되는 순간, 어떤 것이 빠져나가 보였다. 프라랑은 그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파리에서 팔 년 동안, 제 손으로 만들어 봤으니까.

"제작비, 유통, 법률 보호. 전부 라뮤가 맡습니다." 세라의 브리핑에는 형용사가 없었다. "조건은 하나. 굴 서라의 이름, 설화, 레시피, 비주얼—일괄 양도입니다."

제목: 한옥 회의실에서 진세라의 대량 사업 제안을 듣는 프라랑과 도경 - 설명: 한옥 회의실에서 진세라의 대량 사업 제안을 듣는 프라랑과 도경

"일괄." 프라랑이 그 단어를 되짚었다.

"복원이 끝나기도 전에 모조품이 나올 겁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지금 무방비예요. 지키려면 큰 우산이 필요하고, 우산은 공짜가 아니죠." 세라는 물잔을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보존하려면, 먼저 팔려야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방이 조용해졌다. 프라랑은 그 조용함이 싫었다.

"팔리는 것과 넘기는 건 달라요."

"그 차이를 감당할 자본이 있으시면요." 세라가 다음 자료를 넘겼다. "없으시면, 이것도 보시죠."

화면에 뜬 것은 부동산 자료였다. 낯익은 주소. 문향재.

"현 임대인과 매입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계약이 성사되면 문향재 공간은 보존합니다. 라뮤 헤리티지 체험관으로. 간판과 장인은 남겨 드리죠. 소유권만 바뀝니다."

도경의 손등에 힘줄이 섰다. 목소리는, 오히려 낮아졌다.

"껍데기만 남는 건, 남는 게 아입니더."

"껍데기라도 남기려고 다들 저를 찾아옵니다만." 세라는 도경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일주일 드리죠. 팀으로 결정하세요."

"질문 하나만요." 하늘이 손을 들었다. "저희가 거절하면, 건물 매입은요?"

"사업성 검토에 따라 진행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죠." 세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협박도 하지 않았다. 사실만으로 압박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미팅룸을 나서기 전, 세라가 시향지를 한 번 더 코에 가져갔다. 아주 짧은 순간, 사업가의 얼굴 위로 다른 표정이 지나갔다. 그리운 것을 참는 사람의 표정. 프라랑만이 그것을 보았고, 본 것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일단 마음 한쪽에 넣어 두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길, 도경의 시선이 프라랑의 가방에 걸렸다.

반쯤 열린 지퍼 사이로 서류철 모서리가 보였다. 메종 오델리크의 은빛 로고. 파리에서부터 그녀가 들고 다니던, 아직 서명되지 않은 계약서.

복도에서 도경이 걸음을 멈췄다.

"물어봅시다." 그가 말했다. "떠날 사람한테, 이걸 다 맡겨도 됩니까."

프라랑도 멈췄다. 하늘과 카밀이 멀찍이서 따라 멈추는 기척이 났다.

"떠난다고 한 적 없어요."

"계약서는 들고 다니면서예."

"검토는 의무예요.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떠난다고 한 적 없다고요. 당신이, 듣지 않았지."

"뭐라꼬예?"

"파리에서. 문밖에서. 끝까지 들었으면 알았을 거 아니에요."

도경의 귀가 붉어졌다. 이번에는 질투도 부끄러움도 아닌, 정곡의 색이었다.

"파리에서 내가 무슨 말을 끝까지 했는지—" 프라랑이 숨을 골랐다. "경주 가서, 다 얘기할게요. 당신도 왜 먼저 갔는지 얘기해요. 그게 공평하죠."

"……그라입시더."

합의점은 낮았지만, 방향은 처음으로 같았다.

그때, 채 닫히지 않은 회의실 문 너머로 세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무진과의 통화인 듯했다.

"—설화 검증이요? 필요 없습니다. 이야기는 만들어 붙이면 됩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걸로. 굳이, 진짜일 필요 있나요?"

복도의 두 사람이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며칠 만에 처음으로—같은 방향을 보았다. 같은 표정으로.

성수의 골목에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사이의 간격은 아직 한 사람분이었지만, 걷는 속도는 같았다.

"라뮤는 거절해요." 프라랑이 먼저 말했다.

"그라입시더."

"이유가 같은지 확인하고 싶은데요."

"진짜가 아니어도 된다 카는 사람들한테." 도경이 앞을 보며 말했다. "진짜 얘기를 맡길 수는 없지예."

프라랑이 걸음을 멈추고, 가방에서 파리의 서류철을 꺼냈다. 그리고 도경이 보는 앞에서, 가방 제일 안쪽 칸에 밀어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이건 수락한 적 없어요. 검토했을 뿐이에요.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당신도 안 물었잖아요."

"…내도, 안 물었지예."

그것이 두 사람이 그날 나눈 가장 긴 사적 대화였다. 화해라 부르기엔 모자랐고, 냉전이라 부르기엔 따뜻했다.

뒤따라오던 하늘이 카밀에게 속삭였다. "방금 두 분, 대화 삼 분 넘겼어요. 신기록이에요."

"기록하지 마."

"이미 했는데요."

골목 끝에서 하늘이 걸음을 늦춰 카밀과 보폭을 맞췄다. "근데 카밀 씨, 아까 회의에서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들을 때를 아는 것도 조향이야." 카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저 제안—우리 할머니가 들었으면 지팡이를 던졌을 거야. 이야기를 사겠다는 사람들은, 대개 이야기를 읽지 않거든."

"세라 말 중에 하나는 맞아요. 사람들이 이 향에 자기 기억을 붙인다는 거. 그래서 더 함부로 못 해요." 프라랑이 말했다. "진짜인지 모르는 부분까지가, 우리 이야기예요."

"그걸 모른다, 말할 수 있어야 진짜지."

도경은 손에 쥐고 있던 라뮤의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찢는 대신, 모서리를 반듯하게 펴서 프라랑에게 돌려주었다. 답장은 팀의 이름으로 보낼 것이므로.

그때 도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임대인의 메시지였다. 액정 위의 두 문장이, 골목의 노을보다 빨리 어두워졌다.

매각 협의가 빨라졌습니다. 결정 기한을 앞당깁니다.


10화. 향이 지워진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문향재의 처마 끝에서 빗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도경은 마루에 앉아 휴대전화 속 임대인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매각 협의가 빨라졌습니다. 결정 기한을 앞당깁니다. 새로 찍힌 날짜는, 공모전 발표일보다 앞에 있었다.

계산기를 몇 번을 두드려도 같은 답이 나왔다. 모자랐다. 상금이 있어야 닿는 숫자였고, 상금은 기한 뒤에 있었다.

그는 계산기를 덮고 공방을 둘러보았다. 조부의 조부 때부터 돌아온 절구. 손 모양으로 닳은 약숟가락. 백삼십 년의 손때가 앉은 것들이, 빗소리 속에 묵묵히 놓여 있었다.

절구 곁에는 조부의 글씨로 쓴 낡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향은 조급한 손을 제일 먼저 안다. 어릴 적에는 야단치는 말인 줄 알았다. 요즘은, 그 문장이 자꾸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침향이가 마루로 올라와 그의 무릎에 앉았다. 고양이는 비 오는 날이면 늘 그랬다. 도경은 젖은 발자국을 닦아 주며 낮게 중얼거렸다.

"니는 좋겠다. 등기부가 뭔지 몰라가."

지키는 것도 실력이라 카셨는데.

그 문장을 끝까지 잇기 전에, 마당에서 우산 접는 소리가 났다.

프라랑이었다. 한 손에는 서류 두 부. 라뮤의 제안서와—메종 오델리크의 서류철.

안채 테이블 위에 문서 두 부가 놓였다. 그 곁의 선반에는 향낭의 보관함이 있었다. 세 개의 물건이 삼각형을 이루고, 두 사람은 그 삼각형의 바깥에 마주 앉았다.

"라뮤 거절 답신, 오늘 보내요. 팀 명의로." 프라랑이 말했다. "그리고 파리는—"

"파리는예."

"조건부로 협상해 볼 수도 있어요. 프로젝트를 넘기지 않는 조건이면, 연구 지원만 받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직 결정은 안 했어요."

"아직." 도경이 그 단어를 짚었다. "언제까지 아직입니까."

"신중한 거예요."

"미루는 거 아이고예?"

"뭐라고요?"

"라뮤는 하루 만에 거절을 정했으면서, 파리는 와 몇 주째 '아직'입니까."

"그 둘이 같아요? 라뮤는 남의 이야기를 사겠다는 거고, 파리는—" 프라랑이 말을 끊었다. 파리는, 내 이름을 돌려주겠다는 곳이니까. 그 뒷말은 도경 앞에서 하기엔 너무 무거웠고, 하지 않기엔 이미 반쯤 들킨 뒤였다.

도경도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묻는 대신 내용증명을 서랍에 넣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하나씩 닫는 오전이었다. 그 닫힌 문들이 한 시간 뒤에 무엇을 부를지는, 둘 다 알지 못했다.

프라랑의 눈이 좁아졌다. 그때, 테이블 구석에 접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임대인의 내용증명. 새 기한.

"…이게 뭐예요? 기한이 또 당겨졌어요?"

"내가 알아서 합니더."

"알아서? 이거 우리 프로젝트 문제이기도 해요. 왜 늘 혼자 지키려고 해요?"

"니는." 도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갈 데가 있잖아."

방 안의 공기가 멈췄다.

"…그래서 내가 덜 진심이에요?"

대답 대신 빗소리만 커졌다. 프라랑은 일어나 보관함 앞으로 갔다.

"향낭부터 옮겨요. 여기 어수선해질 거잖아요. 메종 쪽 항온 수장고가 나아요."

"지금 움직이면 더 위험합니더. 비 오는 날 습도에, 진동에—"

"여기 두는 것도 위험해요. 건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프라랑이 보관함을 들었다. 도경이 문턱에서 막아서며 함을 받으려 했다. 내놓으라는 손과 놓지 않으려는 손이 상자 양쪽에 걸렸다. 누구의 것이냐를 다투는 손이 아니었다. 어디가 안전하냐를 다투는, 두 개의 걱정이었다. 그래서 더 물러서지 못했다.

"습도 봐요. 지금 팔십이 넘어요."

"그라니까 문 열지 말자는 거 아입니까."

"항온 수장고면 사십오로 고정돼요."

"가는 길 이십 분은예. 이 비에."

서로의 말이 전부 맞아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때—프라랑의 팔에 걸려 있던 라뮤 파일의 금속 클립이, 함 안쪽으로 늘어져 있던 낡은 비단 끈에 걸렸다.

당겨졌다.

아주 오래된 실 한 올이 끊어지는 소리는, 빗소리보다 작았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들었다.

함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경이 잡았다. 다만 그 짧은 흔들림에, 천 년을 버틴 안감의 솔기 한쪽이—벌어졌다.

솔기 틈으로, 안감 안쪽에 굳어 있던 잔향 조각과 고운 가루가 흘러나왔다. 바닥으로. 공기 중으로.

제목: 비 오는 날 향낭 솔기가 벌어져 향 가루가 퍼지는 순간 함께 보존함을 붙드는 두 사람 - 설명: 비 오는 날 향낭 솔기가 벌어져 향 가루가 퍼지는 순간 함께 보존함을 붙드는 두 사람

"움직이지 마요." 프라랑의 목소리가 조향사의 것으로 바뀌었다. "공기부터 막아."

"창문 닫을게."

도경이 창을 닫고 돌아섰을 때, 방 안에는 천 년 묵은 향이 풀려나 있었다.

한 번도 이렇게 짙게 열린 적 없는 향이었다. 그리고 열린 향은—돌아가지 않는다. 두 사람 다 아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원본의 잔향은 시간과 함께 옅어질 것이다.

프라랑의 머릿속에서, 소이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간이 모래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천 년을 버틴 것이 방금 두 사람의 손에서, 시계가 되었다.

그 향의 한가운데에서, 도경이 멈췄다.

동공이 정지했다.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시선은 벽을 지나, 지붕을 지나, 이 방에 없는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손끝이 허공을 짚듯 떨렸다.

"또…." 그가 갈라진 소리로 말했다. "그 항구."

"무슨 말이에요?"

도경의 무릎이 꺾였다. 프라랑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이 차가웠고,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은 여전히, 여기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프라랑의 머리가 감정보다 빨리 돌았다.

사라지는 향. 다시 못 맡을 원본. 지금 해야 할 일.

그녀는 도경의 손을 의자에 옮겨 쥐여 주고, 아틀리에 냉장고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분석값을 따라 미리 조합해 둔 근접 베이스—원본을 흉내 내 보던 실험작이었다. 그것을 시향지에 적셔 공기 중에 퍼뜨렸다. 사라지는 원본과, 자신이 만든 근사치. 두 향의 차이를 지금 몸에 새겨 두어야 했다.

"뭐 하는 깁니까, 지금—"

"비교요. 원본이 사라지기 전에, 내 근사치가 어디까지 왔는지. 지금 아니면 영영 몰라요."

조향사의 손은 울면서도 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프라랑은 그날, 그것을 처음 알았다.

도경도 일어섰다. 흔들리는 다리로, 그러나 정확한 손으로. 그는 원료장의 병들을 꺼내 프라랑에게 차례로 건넸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지 않고도 아는 손이었다. 사고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 대신, 오래 손발을 맞춰 온 자리로 도로 데려다 놓고 있었다.

"기억하지 말고, 맡아요." 그녀가 도경 앞에 시향지를 세웠다. "지금 향과 내가 만든 향의, 차이만."

도경이 초점을 되찾으려 애쓰며 시향지를 받았다.

"…니 손, 떨립니다."

"당신도요."

두 향이 방 안에서 겹쳤다. 천 년의 원본과, 그것을 좇아온 오늘의 손. 두 나선이 스치는 그 찰나—

프라랑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가슴이 데워지고, 눈두덩이 뜨거워지고, 그리고.

항구가 보였다.

밤. 횃불. 물비린내 위로 층층이 쌓인 향. 배 한 척. 난간을 쥔 여자의 손. 그 손목에서 등불을 받아 반짝—

환영은 숨 한 번 사이에 닫혔다. 프라랑은 시향지를 쥔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방금 본 것을 부정할 논리를 찾아보았다. 피로. 암시. 착각. 어느 것도 손목 아래 심장이 뛰는 속도를 설명하지 못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도경이었다.

그는 바닥을 보며, 아주 천천히, 벼르던 것을 내려놓듯 말했다.

"니가 만든 향 맡으면… 자꾸, 어떤 여자가 배에서 우는 기 보인다."

"……."

"처음 아이다. 향낭 처음 맡던 날도, 그 담에도. 오늘은—장면이 이어졌다. 여자가 뭘 두고 가더라. 미친 소리 같제."

프라랑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그리고 정확하게 답했다.

"아니. 나도 보여."

도경이 고개를 들었다.

"배. 난간을 잡은 여자. 그 손목에—" 프라랑이 제 왼손목을 들어 보였다. 낡은 리본이 거기 있었다. "이거랑 닮은 게 있었어요."

비가 그쳐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미쳤다고 말해 줄 사람이 서로뿐이라는 사실이, 이상한 방식으로 위로가 되었다.

"언제부터 봤어요?" 프라랑이 물었다.

"향낭 처음 열던 날." 도경이 천천히 답했다. "알레르기라 캤던 날. …거짓말이었습니더."

"알아요. 한쪽 눈만 우는 알레르기는 없다니까."

"니는 언제부텁니까."

"방금요. 그리고—어쩌면, 엄마 향수를 처음 열었던 열세 살부터였는지도 모르고요."

말해 놓고 보니, 둘 다 오래 혼자였다. 이상한 것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못 하고.

"그라믄." 도경이 잡힌 손에 처음으로 힘을 주었다. "끝까지, 같이 봅시다."

프라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놓을 이유를, 둘 다 찾지 않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향가루를 한 톨까지 회수해 밀폐 봉투에 담고, 손상 부위를 촬영하고, 기록을 남겼다. 봉투 라벨에 프라랑이 적은 글씨는 담담했고, 그래서 더 절박했다.

원본 잔향 — 최종 비교 가능 시간, 미상.

봉투 속에서, 마지막 향기가 숨을 아끼고 있었다.


11화. 천년의 레시피


사고가 난 날 밤, 문향재의 큰 작업상 위에 팀의 전부가 펼쳐졌다.

분석 그래프. 엄마의 노트. 필사본 사본. 원료 병들. 향낭의 기록 사진. 하늘이 그 원형의 한가운데 서서 항목마다 체크를 해 나갔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제목: 장미 유향 침향 모과 솔의 다섯 향재를 꽃 형태로 배열한 조향 재료 자료 - 설명: 장미 유향 침향 모과 솔의 다섯 향재를 꽃 형태로 배열한 조향 재료 자료

"정리할게요. 잃은 건 마지막 비교 샘플. 그게 다예요. 우리가 기록한 것까지 잃은 건 아니에요."

측정값, 사진, 영상, 공정 메모. 몇 달 치의 기록이 상 위에 살아 있었다. 프라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추측부터 버리자. 확정, 추정, 미상. 세 칸으로 다시."

밤이 깊도록 포스트잇이 칸 사이를 옮겨 다녔다. 확정 칸이 가장 길었고, 그것이 팀을 버티게 했다. 다섯 원료—확정. 훈증 공정의 존재—확정. 모과·침향 전처리 가설—추정. 마지막 향재의 정체와 비율—미상. 미상 칸은 제일 짧았지만, 제일 무거웠다.

"미상, 두 개." 프라랑이 그 칸을 톡톡 두드렸다. "천 년이 우리한테 낸, 마지막 문제네."

밤샘 분류가 시작되려는 때, 카밀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스트하우스에 다녀온 그의 손에는 낡은 가죽 케이스—사본이 아니라, 원본이 들려 있었다.

"안전한 곳에 있다더니." 프라랑이 놀랐다.

"제일 안전한 곳이 어딘지, 생각이 바뀌었어."

카밀은 장갑을 끼고, 여덟 잎 로제트가 압인된 케이스를 열었다. 평소의 무대 조명 같은 표정이 없었다. 하늘이 촬영 각도를 보존 기록용으로 바꿨다.

"원본에는 사본에 없는 게 있어. 뒷면의 압인. 여백의 메모." 그가 문서를 상 중앙에 내려놓았다. "핏줄이 진짜라면—움켜쥐는 게 아니라, 이어야겠지."

"…고마워."

"고마우면 크레딧 순서에서 알파벳순을 고려해 줘. 아슈티아니는 A야."

농담이 돌아왔다는 것은, 카밀이 결심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근데 왜 마음이 바뀌었어요?" 하늘이 물었다.

"파손 소식을 듣고 생각했지. 내 반쪽을 금고에 두고 너희 반쪽이 사라지면—" 카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평생 절반의 계승자야. 그건 낭만이 아니라, 그냥 반쪽짜리지."

원본은 약속대로 더 많은 것을 내놓았다.

여백의 흐린 글씨에서 사본에 없던 공정의 동사들이 나왔다. 카밀이 읽고, 프라랑이 엄마의 번역 메모와 대조하고, 도경이 공정 표에 옮겼다.

꽃을 연기로 묶고, 나무의 숨을 세 번 쉬게 한다.

"묶는다는 훈증이겠고." 도경이 표를 짚었다. "숨을 쉬게 한다는 건조·숙성 같은데—문제는 이깁니더."

그의 손끝이 마지막 향재의 이름 앞에서 멈췄다. 페르시아 문자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듯한, 어느 사전에도 없는 낱말.

"이 이름, 재료가 아니라 별칭 같심더. '세 번'도 시간인지 횟수인지 모르겠고."

비율 칸도 비어 있었다. 숙성을 언제 멈추는지도 없었다. 문장은 있는데, 이름과 숫자가 없었다.

"기록이 이만큼 남았는데 정작 숫자가 없다는 건." 프라랑이 노트를 넘기다 멈췄다. "숫자를 종이에 안 적었다는 거예요. 다른 데 적었지. …이름과 순서를, 노래로 외웠다면?"

그때까지 마루 끝에서 듣고만 있던 백령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노래라 카믄—" 그녀가 일어섰다. "물어볼 사람이 있다."

새벽이 오기 전의 병실은 조용했다.

서일만은 창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등은 곧았고, 손자를 보는 눈은 향을 감별하던 시절의 정확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할배." 도경이 침대 곁에 낮게 앉았다. "문향재에서 향 말릴 때, 부르던 노래 있지예."

"노래?" 일만이 웃었다. "그기 노래가. 일하는 숨소리지."

"그 숨소리, 누가 가르쳐 줬는데예."

"아버지가. 아버지는 그 아버지한테 배웠고." 일만이 손자를 보았다. "니한테는 내가 안 가르쳤제. 기계로 배우는 시대라꼬, 노래는 인자 필요 없을 줄 알았다."

"필요합니더." 도경이 말했다. "지금, 그 노래가 마지막 열쇠라예."

일만은 한동안 손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라믄 잘 들어라. 두 번은 안 부른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세 번 불렀다. 하늘이 부탁할 때마다.

세 번째 노래가 끝났을 때 창밖이 밝아 오고 있었다. 병실의 새벽은 향사의 새벽과 닮아 있다고, 프라랑은 생각했다. 무언가가 완성되기 직전의, 숨을 고르는 빛.

제목: 새벽 병실에서 오래된 향 노래를 부르는 일만과 이를 잇는 백령, 기록하는 프라랑 - 설명: 새벽 병실에서 오래된 향 노래를 부르는 일만과 이를 잇는 백령, 기록하는 프라랑

"그 숨소리, 한 번만 들려 주이소."

일만은 창밖의 어두운 경주를 잠깐 보았다. 그리고 주름진 손으로 무릎을 치며, 박자를 세기 시작했다. 낮고 갈라진,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가락이 병실에 풀렸다.

세 번 감고, 한 번 쉬고. 다섯 번 뒤집어, 꽃 볼 때까지.

가락 사이사이, 낯선 낱말들이 지나갔다. 향재를 부르는 옛 별칭들. 하늘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그 전부를 녹음하고 받아 적었다.

"종이에 없는 건 손이 외우고." 일만이 노래를 맺으며 말했다. "손이 늙으면, 노래가 외우는 기다."

문가에 서 있던 백령이, 다음 소절을 먼저 이어 불렀다.

일만의 눈이 커졌다. 두 노인의 가락이 반 소절쯤 겹쳤다가, 멎었다.

"…니는 그때도 노래만 했제." 백령이 말했다.

"말로 하면, 날아갈까 겁났다."

육십 년 전의 경주가 병실에 잠깐 다녀갔다. 프라랑은 그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향 말리는 마당, 노래를 주고받던 젊은 두 사람, 건네려다 도로 숨긴 작은 향낭 하나. 각자의 집과 책임 앞에서 접어 둔 마음. 아무도 그 시절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고, 아무도 설명을 청하지 않았다. 노래 한 소절이면 충분한 이야기였다.

돌아오는 차 안은 작업실이 되었다.

하늘이 녹음을 돌리고, 프라랑이 받아 적고, 도경이 옛 계량과 절기를 환산했다. 노래 속 별칭 하나가 엄마 노트의 후보와 정확히 포개지는 순간, 차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마지막은—모과였어." 프라랑이 말했다. "정확히는 모과 계열의 옛 향재. 별칭이 달라서 못 알아본 거야. 그리고 숫자는 양이 아니라, 순서였고."

"세 번 감고는 세 번 훈증." 도경이 이어받았다. "한 번 쉬고는 식힘. 다섯 번 뒤집기는 숙성 중 뒤집는 횟수라예. 그라고 마지막 구절—꽃 볼 때까지."

"숙성을 끝내는 기준이 무게나 날짜가 아니라는 거네요." 하늘이 말했다.

"향이지예. 마지막은 무게가 아니라, 향으로 멈추는 기다."

미지정 봉우리의 정체가 그제야 온전히 섰다. 없는 원료가 아니었다. 다섯 재료가 그 순서와 그 호흡을 지나며 함께 만들어 내는, 이름 없는 여섯 번째—시간의 향이었다.

"그래서 데이터베이스에 없었던 거예요." 하늘이 정리했다. "원료가 아니라, 요리법이었으니까."

"천 년 전 사람들은 그걸 알았던 거고요." 프라랑이 창밖의 새벽을 보았다. "레시피의 마지막 줄을 종이가 아니라 사람한테 적어 뒀어요. 노래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적는 곳을 잘 골랐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종이는 찢기지만, 노래는 반쪽이 나지 않으니까.

◆ 무흔의 맹세 — 그 밤의 부두, 날이 밝은 뒤

배는 이미 수평선의 점이 되어 있었다.

무흔은 부두 끝에 서서, 두 손으로 감싼 향낭을 내려다보았다. 지키라는 것이 향입니까, 약속입니까. 어젯밤의 제 물음이 아직 손안에 남아 있었다. 둘은 같은 것이야. 공주의 답도.

등 뒤로 발소리가 왔다. 소이였다. 늙은 향사는 밤새 부두에 서 있던 청년의 곁에 말없이 섰다.

"어르신." 무흔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이것을, 제가 못 이룬 마음으로 지키지 않겠습니다."

"……."

"두 분이 이룬 약속으로 지키겠습니다. 그쪽이, 더 오래갈 테니."

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향낭을 싼 비단 위에 늙은 손을 잠깐 얹었다.

"잘 들어라. 향은 닫아 두면 죽는다. …때가 오면, 열어야 한다."

"때는 어떻게 압니까."

"이 향이 다시 피는 날이라 하셨다." 소이가 수평선을 보았다. "그날은, 향이 먼저 알 것이다."

두 사람은 왕궁 쪽으로 돌아섰다. 새벽빛이 부두의 물비늘 위로 퍼지고 있었다. 그 빛이—

천 년 뒤, 문향재 아틀리에의 조향 접시 위에도 퍼지고 있었다.

축제 당일 새벽이었다. 상 위에는 다섯 원료가 노래의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세 번의 훈증과 한 번의 식힘과 다섯 번의 뒤집기를 지나온, 며칠 치의 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프라랑이 피펫을 들었다. 마지막 한 방울이 그 끝에 맺혔다.

도경이 온도계를 확인하고, 접시 위의 향 상태를 코로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과 하늘과 백령이 숨을 죽였다. 백령의 무릎 위에는 수선을 기다리는 손상 향낭이 보존 상자 안에 놓여 있었다. 천 년 전의 스승이, 천 년 뒤의 제자들을 지켜보는 자리 같았다.

"이건 엄마의 향도, 공주의 향도 아니야." 프라랑이 말했다. 손끝은 떨리지 않았다. "우리가, 이어 만든 향이야."

"떨어뜨리소." 도경이 답했다. "같이 맡을 테니."

한 방울이, 떨어졌다.

제목: 백령과 프라랑, 도경이 문향재에서 천년향의 마지막 배합을 완성하는 장면 - 설명: 백령과 프라랑, 도경이 문향재에서 천년향의 마지막 배합을 완성하는 장면

향이 완성되는 소리는 없다. 다만 방 안의 다섯 사람이 동시에 숨을 멈췄다가, 동시에 내쉬었다. 그것이 소리라면, 소리였다.

백령이 제일 먼저 눈시울을 훔쳤고, 제일 먼저 부엌으로 향했다.

"밥 묵자. 큰일 한 날은, 밥이 먼저다."


※ 일러두기 — 일만의 노래와 '세 번 훈증, 한 번 식힘, 다섯 번 뒤집기'의 공정은 작중 창작 설정이며, 실제 전통 조향 공정의 고증이 아닙니다. 과거 파트 역시 『쿠쉬나메』 기반의 설화적 상상입니다.



12화. 굴 서라, 서라벌의 꽃


축제의 아침, 첨성대 앞 광장은 빈 도화지였다.

해가 오르는 동안 부스가 서고, 시향 동선이 그려지고, 무대가 올라갔다. 하늘은 무전기와 짐벌을 양손에 들고 광장을 종횡으로 누볐고, 카밀은 해외 관람객 안내 부스에서 네 개 언어로 재능을 낭비하지 않았다.

제목: 첨성대 앞 밤 축제에서 향의 기억이 천 년 전과 현재를 잇는 장면 - 설명: 첨성대 앞 밤 축제에서 향의 기억이 천 년 전과 현재를 잇는 장면

메인 부스 위에는 두 개의 간판이 나란히 걸렸다. 메종 프라랑. 문향재. 같은 크기, 같은 높이였다. 그 아래 공동 현판—천년향.

"오늘 주인공은 두 분 아니고 향이에요." 하늘이 최종 점검을 하며 못을 박았다. "사고 치지 마세요."

"나는 원래, 향 다음으로 주인공이야."

"카밀 씨한테 한 말 아니거든요."

광장 초입에는 골목 사람들도 자리를 잡았다. 무료 시향 날의 그 백발 어르신은 손주의 손을 잡고 왔고, 첫날의 택시 기사는 비번인데도 왔다며 황남빵 한 상자를 부스에 놓고 갔다. 배고플 때 맡아 보이소, 그기 젤 셉니더—다섯 달 전의 그 말을, 이제는 팀 전원이 알아들었다.

백령은 보존 상자를 품에 안고 왔다. 수선을 마치지 않은 손상 향낭이 그 안에 있었다. 시작한 것이 끝을 보는 자리에는, 처음의 물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고집이었다.

해가 지고, 첨성대 위로 첫 별이 떴다.

무대 뒤 준비실에서, 프라랑과 도경은 완성된 병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확인을 했다.

각자 시향지를 들고, 각자 눈을 감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뜬 눈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의 표정이 같은 답을 하고 있었다. 준비됐다.

원본 잔향 봉투는 열지 않은 채 옆에 두었다. 마지막 남은 원본을 소모하며 확인받는 대신, 몇 달의 기록과 서로의 코를 믿기로 한 것이다. 엄마의 노트, 필사본, 일만의 공정표 위에 하늘이 준비한 체크리스트가 전부 초록으로 채워져 있었다.

"보여 줄 게 있어요." 프라랑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발신함이었다. 수신인, 메종 오델리크. 어젯밤 날짜.

이번 제안은 거절합니다. 제 이름의 향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도경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기뻐하는 대신, 그는 정직해지는 쪽을 택했다.

"내 때문에 남는 건, 하지 마이소."

"당신 때문 아니에요." 프라랑이 휴대전화를 거두며 말했다. "내가 만든 향 때문에 남아요. 당신은…."

그녀는 잠깐 뜸을 들였고, 그 잠깐 동안 도경의 귀가 붉어졌다.

"그다음 이유."

무대 호출 음성이 준비실에 울렸다.

무대 위의 프라랑은 팔 개월 전 파리의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저희는 오늘, 천년 전의 정답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이 향의 이야기는 절반이 설화이고, 절반이 저희 가족들의 구전이며, 나머지는 저희 네 사람의 몇 달입니다. 저희는 다만—남겨진 반쪽들을, 오늘의 언어로 이어 보았습니다."

도경이 원료와 공정을 시연했다. 다섯 향재가 순서대로 소개되고, 카밀이 필사본의 문장을 원어로 읽고, 하늘의 중계 화면이 그 모든 출처를 자막으로 밝혔다.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적었습니다." 프라랑이 화면 속 미상 칸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이 빈칸까지가 저희의 결과물입니다."

객석 어딘가에서 박수가 먼저 터졌다. 박물관 강연의 그 강연자였다.

심사석의 위원 하나가 옆자리에 속삭이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자막은 없었지만 입 모양은 읽을 수 있었다. 저렇게 비워 놓으니까, 오히려 믿기네. 병원 병실에서는 일만이 중계 화면 앞에 앉아 백령의 전화기를 통해 같은 무대를 보고 있었다.

"향은 말 안 해도 남는 기라." 도경이 시연을 마치며 말했다. "사람 마음이랑,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시향 장치의 덮개에 올라갔다.

덮개가 열렸다.

제목: 첨성대 야간 축제 무대에서 완성된 천년향을 공개하는 프라랑과 도경 - 설명: 첨성대 야간 축제 무대에서 완성된 천년향을 공개하는 프라랑과 도경

향은 서두르지 않았다.

유향이 먼저 길을 열었다. 오래된 성전의 문이 열리듯, 서늘하고 깨끗한 숨이 광장의 공기를 갈랐다. 장미는 그 길 위로 왔다. 지배하러 오지 않고, 초대받아 왔다. 침향이 그 아래에서 중심을 잡았다. 천 년쯤 눌러 둔 시간의 무게로. 그리고 모과와 솔이—서라벌의 계절이 그러하듯—단내와 바람으로 그 전부를 감쌌다.

제목: 다섯 색의 향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천년향 향수병 - 설명: 다섯 색의 향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천년향 향수병

어느 것도 이기지 않았다. 어느 것도 지지 않았다.

광장 곳곳에서 사람들이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할머니의 장롱을, 누군가는 첫눈 오던 골목을, 누군가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리움을 떠올렸다. 관람석 한쪽의 진세라도 시향지를 들고 있었다. 세 번에 나누어 확인하던 그 정확한 동작이, 이번에는 한 번에 무너져 있었다.

무대 위의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광장이 항구가 되었다.

이번에는 한 프레임이 아니었다. 흔들리지도, 끊기지도 않았다.

밤의 부두. 층층이 쌓인 향. 마지막 향을 손에 든 여자와, 그것을 받는 청년. 지키라는 것이 향입니까, 약속입니까. 둘은 같은 것이야. 배 위에서 서로의 손을 잡는 두 사람. 여자의 눈물. 그리고 멀어지는 뱃전에서, 그녀가 서라벌을 향해 외치는 한 문장.

이 향이 다시 피는 날, 우리는 다시 만난다.

그 한 문장만이 또렷하게 들렸다. 곁에 선 이방의 왕자도 무어라 입을 움직였지만, 그 말은 바람 속에 소리 없이 남았다. 천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밝아지고—기억은 빛으로 풀려, 닫혔다.

축제의 소리가 돌아왔다.

프라랑의 뺨 위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경의 뺨에도. 둘은 그것을 닦지 않았다. 무대 위의 관객들에게는, 자신들이 만든 향에 겨운 조향사들로 보였을 것이다. 절반은, 맞는 말이었다.

프라랑이 낮게, 도경에게만 들리게 물었다.

"봤죠."

"끝까지예."

"……다시 만난다고 했어."

"예." 도경이 광장의 사람들을 보며 답했다. "피웠으니까예. 우리가."

발표는 그날 밤의 마지막 순서였다.

공모전 대상, 천년향 프로젝트.

상금은 문향재의 보증금에 정확히 닿는 액수였다. 도경은 무대 뒤에서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 너머의 일만은 한참 말이 없다가 딱 한마디를 했다. 잘 지켰다. 도경의 귀가 붉어졌고, 이번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세라가 부스로 찾아온 것은 정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녀는 축하한다고 말했고, 그 말은 형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래, 말이 없었다.

"본부장님도 말이 없어질 때가 있네요." 하늘이 말했다.

"오늘은." 세라가 시향지를 접어 수첩 갈피에 끼우며 답했다. "향이 먼저 말했으니까요."

그녀는 명함을 새로 두고 갔다. 뒷면에 손글씨 한 줄이 있었다. 서사를 만들지 않고 지키는 법이 궁금해지면, 연락 주세요.

환호가 잦아든 광장을 빠져나와, 두 사람은 동궁과 월지 쪽으로 걸었다.

수면에 별과 전각의 불빛이 함께 비쳤다. 물가의 길은 조용했고, 두 사람의 간격은—어느새, 반 사람분이 되어 있었다.

"물어볼 게 있습니더." 도경이 걸음을 멈췄다.

"물어봐요."

"천년 전에 누가 기다렸다 캐서." 그의 귀는 이미 붉었지만, 목소리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래서 좋아한 거, 아입니더. 나는."

"……."

"공주고 왕자고 다 빼고. 담장 너머에서 향 갖고 싸우던, 그—지금의 니가 좋습니더."

수면의 별빛이 흔들렸다. 프라랑이 한 걸음, 먼저 다가섰다.

"알아요." 그녀가 웃었다. "나도, 지금의 당신이 좋아요. 천 년은 그냥… 아주 긴 프롤로그였던 걸로 하죠."

"그라믄, 됐다."

수면 위에서 두 그림자가 하나로 겹쳤다.

제목: 동궁과 월지의 달빛과 전각 불빛 아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프라랑과 도경 - 설명: 동궁과 월지의 달빛과 전각 불빛 아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프라랑과 도경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작된 전쟁은, 그렇게 담이 필요 없는 자리에서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도경이 불쑥 말했다. "계약서 제3조. 사적 대화 금지 말입니더."

"폐기해요, 그건."

"아니예. 개정합시더. …사적 대화, 의무 조항으로."

"…조항 문구는 내일 같이 써요."

"내일 말고, 맨날예."

다음 날 아침의 메종 프라랑은 늦잠 같은 평화 속에 있었다.

백령은 창가에 앉아 손상된 향낭의 안감을 수선하고 있었다. 천 년 묵은 솔기를 다루는 손은 느리고 정확했다. 그 손이, 문득 멈췄다.

"보랑아. 이리 와 보그라."

벌어진 솔기 안쪽, 안감이 한 번 더 접힌 자리. 그 숨은 접힘 속에 가는 실로 수놓인 글자들이 있었다. 한 번도 펼쳐진 적 없는, 안쪽의 문장.

카밀이 불려 왔다. 그는 돋보기를 들고 그 옛 페르시아 문자를 한 자씩 짚어 나가다가, 목소리를 잃었다. 그리고 천천히, 번역했다.

"이 향이 다시 피는 곳에서—나는, 그대를 기다린다."

제목: 천 년 향낭 안감의 숨은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을 상징하는 자개함과 향낭 - 설명: 천 년 향낭 안감의 숨은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을 상징하는 자개함과 향낭

방 안이 조용해졌다.

떠난 사람의 약속에, 남은 자리의 응답이 천 년 동안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안감의 안쪽에서.

"잠깐만요." 하늘이 침묵을 깼다. "'기다린다'가 과거형이 아니잖아요. 그럼… 누가, 기다리고 있는 건데요?"

그 물음에 답하듯—대문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국제우편이었다. 수신인은 천년향 프로젝트 팀. 봉투는 낡지 않았고, 소인은 선명했다.

프라랑이 봉투를 뒤집었다. 발신지가 거기 있었다.

IRAN · DAMAVAND.

이란, 데마반드.

침향이가 봉투에 코를 대더니, 재채기 대신—낮게, 길게 울었다.

제목: 데마반드 산을 암시하는 국제우편과 향낭을 살피는 검은 고양이 침향이 - 설명: 데마반드 산을 암시하는 국제우편과 향낭을 살피는 검은 고양이 침향이


※ 일러두기 — 본 작품의 과거 이야기는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와 '바실라=신라' 학설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이며,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쿠쉬나메는 11세기 말~12세기 초에 기록된 실존 문헌이지만, 작중 향낭·굴 서라·등장인물의 사연은 상상의 산물입니다.



— 시즌 1 완결 —

「메종 프라랑: 천년의 향」 시즌 2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