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ARANG MAGAZINE · CULTURE & SCENT
신라공주, 천 년의 이름
검색창의 아이돌에서, 쿠쉬나메의 공주, 그리고 향(香)이 된 프라랑까지
글 · 프라랑 매거진 편집부
PROLOGUE · 검색창에서 시작된 여행
2026년 여름, ‘신라공주’를 검색하면
포털 검색창에 ‘신라공주’를 입력하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건 천 년 전의 서라벌이 아니다. 걸그룹 리센느(RESCENE)의 막내, 제나 다. 경상북도 경주가 고향인 그녀는 최근 고향의 홍보대사로 위촉됐고, 경주시는 “신라공주 야호”를 외쳤다.
처음엔 그저 ‘천년고도 출신 아이돌’에게 붙은 귀여운 별명처럼 보였다. 그런데 제나가 방송에서 자신이 경주 김씨라고 밝히는 순간, 농담은 다른 무게를 갖는다. 경주 김씨는 13대 미추 이사금 이래 신라를 다스린 대표적 왕실 가문. 별명이 혈통을 앞질러 붙은 게 아니라, 혈통이 별명을 뒤늦게 증명한 셈이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다. 수많은 사람이 ‘신라공주’를 검색하지만, 정작 그 이름의 원래 주인들—서라벌에서 실제로 태어나 사랑하고 정치했던 딸들, 그리고 페르시아 서사시 속으로 걸어 들어간 또 한 명의 공주—은 화면 어디에도 잘 뜨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은 일종의 역방향 검색이다. 밈이 데려다준 입구에서, 천 년 전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PART I · 역사가 기록한 신라공주들
공주가 왕이 되던 나라

신라 금관을 모티프로 한 일러스트 — 곡옥(曲玉)과 나뭇가지·사슴뿔 형 세움장식
먼저 짚어둘 것이 있다. 신라의 ‘공주’는 조선의 공주와 다르다. 조선에서 공주가 담장 안쪽에 머무는 봉호였다면, 신라에서 왕의 딸은 대개 그냥 공주라 불렸고, 무엇보다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사를 통틀어 여성 국가원수는 단 네 명. 그중 셋이 신라의 여왕—선덕·진덕·진성—이었다. 공주가 왕이 될 수 있는 나라. 이 한 문장이 서라벌 딸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결로 만든다.
덕만공주 — 최초의 여왕이 된 공주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맏딸로 기록한다. 아버지는 사위에게 왕위를 넘기는 대신 자신의 핏줄인 딸을 후계자로 점찍었고, 그렇게 덕만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되었다. 향기 없는 모란 그림을 알아본 예언, 그의 치세에 세워졌다 전하는 첨성대, 그리고 비담의 난을 진압하며 다져진 중앙집권의 토대—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발판이 이 시대에 놓였다.
천명공주 — 통일의 씨앗을 낳은 언니
덕만에게는 언니 천명공주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여왕만큼 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흐릿한 이름이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계보의 결정적 마디에 놓여 있다. 천명공주는 김용춘과 혼인해 아들 김춘추—훗날 삼국 통일의 문을 연 태종 무열왕—를 낳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여왕 옆에서, 이름이 덜 불린 언니가 다음 세대를 조용히 세상에 내놓는 방식. 역사는 종종 이렇게 움직인다.
요석공주 — 금기를 넘은 사랑, 그리고 한 학자
가장 이야기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석공주다. 태종 무열왕의 딸이자 문무왕의 누이인 그는 일찍 남편을 잃고 요석궁에 홀로 살았다.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불법을 설파하던 승려 원효가 다리에서 떨어져 젖은 옷을 말리려 요석궁에 들렀다가 그와 인연을 맺는다. 골품제의 금기를 정면으로 거스른 이 사랑에서 태어난 아들이 설총—이두를 정리하고 신라 유학을 대표한 대학자다. 한 번의 사랑이 우리 문자 생활의 한 페이지를 열었다.
선화공주 — 전설이 가장 사랑한, 그러나 뒤집힌 이름
‘신라공주’ 하면 대중의 기억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어쩌면 선화공주일 것이다. 《삼국유사》 속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 국경을 넘어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된 공주. 그런데 이 전설은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봉안기가 절을 세운 왕비를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적으면서 한 번 뒤집혔다. 전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그것은 오히려 다른 질문을 남긴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오래 ‘국경을 넘어 사랑을 택한 신라공주’를 기억하고 싶어 했을까.

PART II · 페르시아 서사시 속 신라공주
또 하나의 신라공주, 프라랑

쿠쉬나메 — 하나의 별 아래, 페르시아와 신라를 잇는 바닷길
그리고 여기, 정사(正史)의 족보에는 없지만 페르시아의 서사시가 기억하는 신라공주가 있다. 이름은 프라랑(Frarang). 11세기 페르시아 시인이 편찬한 대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주인공이다. 800여 쪽 가운데 신라 관련 대목이 500여 쪽에 이르고, 작품 속에서 신라는 ‘바실라(Basila)’—더 좋은 신라—라 불린다.
바실라, ‘더 좋은 신라’라는 뜻이었다
— 쿠쉬나메가 부른 신라의 이름
이야기는 이렇게 흐른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왕자 아비틴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한다. 신라왕 타이후르는 그를 극진히 환대하지만, 딸을 이방인에게 내주기를 망설이며 시험을 낸다—열 명의 처녀 사이에 공주를 숨겨 두고 “찾아보라” 한 것. 아비틴은 공주 프라랑을 알아보고, 우여곡절 끝에 혼인이 성사된다.
주목할 것은 프라랑이 결코 수동적인 공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미지의 땅을 꿈꾸던 여성이었고, 부모와 오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결혼을 택했으며, 남편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러 페르시아로 떠날 때 그 험난한 항해에 함께 올랐다. 이국에서 그는 아들 페리둔을 낳는다. 아비틴은 원수에게 목숨을 잃지만, 신라 공주의 아들 페리둔은 훗날 폭군을 물리치고 페르시아를 구한 구국 영웅이 되어, 어머니의 나라 신라와 대를 이어 인연을 잇는다.
쿠쉬나메, 한눈에 ◈ 장르 — 11세기 페르시아 구전 영웅 서사시(문학적 상상). 역사 기록 그 자체는 아니다. ◈ 발굴 — 이희수 교수 등이 2009~2010년 국내에 소개, 영국국립도서관 소장 필사본을 확보해 국제 공동 연구. ◈ 인물 대응설 — 왕자 아비틴은 당으로 망명한 사산조 왕자 피루즈(페로즈)와, 신라왕 타이후르는 무열왕·문무왕 시대와 곧잘 견주어진다. ◈ 교류의 흔적 — 천마총 유리잔, 황남대총 은잔의 여신 아나히타 등 신라 속 페르시아의 자취는 실제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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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쿠쉬나메는 ‘아랍에 대한 페르시아의 복수’로 끝나는 대체역사풍 문학이다. 프라랑과 아비틴의 혼인을 곧장 실제 사건으로 등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슬람권이 신라를 ‘황금의 섬’으로 그리며 오래 상상했다는 사실, 그 상상의 한복판에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신라공주가 놓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프라랑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신라’의 얼굴이다.

INTERLUDE · 천 년을 넘나드는 가마
이름을 태운 가마

천 년을 건너는 방 — 신라 공주의 가마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그리다
한 채의 가마를 상상한다. 붉은 휘장을 드리운 작은 방, 그 안에 서라벌의 공주가 앉는다. 가마꾼의 발끝이 땅을 밀 때마다 방은 조용히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공주는 왕궁을 떠나 새로운 이야기 쪽으로 실려 간다. 요석궁의 젊은 과부에게도, 바다 건너 페르시아로 향하던 프라랑에게도, 삶의 결정적 순간에는 늘 한 채의 가마가 있었다.
가마는 시간을 건너는 방이다
— 서라벌에서 오늘까지
그리고 그 가마는 멈추지 않았다. 천 년의 길을 건너, 오늘 그것은 더 이상 나무와 비단이 아니라 한 병의 향으로 움직인다. 뚜껑을 열면—레몬의 첫 향에서 우드의 잔향까지—가마의 문이 열리듯 이름 하나가 걸어 나온다. 프라랑. 서라벌에서 출발한 그 가마는, 지금 당신의 공간에 도착해 있다.
PART III · 향(香)으로 돌아온 이름
향을 입는 공주, 브랜드 ‘프라랑’

곡옥을 엠블럼으로 품은 향(香)의 오브제
그렇게 잊혀 가던 이름이, 21세기에 향(香)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의 향 솔루션 브랜드 프라랑(FRARANG)은 바로 그 바실라의 공주 프라랑에게서 이름을 빌려 왔다. 탈취성분과 감각적인 복합향기를 결합해, 디퓨저와 향수를 통해 공간과 일상을 향으로 다시 짓는 브랜드다.
브랜드가 스스로 말하는 세계관은 이렇게 요약된다. 과거 신라 왕족이 향으로 자신을 표현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향수로 ‘나’라는 존재를 완성한다는 것.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지던 이국의 향료, 왕족의 공간을 채웠던 짙은 우드, 그리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프레시한 톤—이 셋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인 향이 태어난다는 질문에서 프라랑은 출발했다.
“우리는 향을 입는다”
— 프라랑이 향을 정의하는 방식
그들에게 향은 액세서리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이자 정체성이다. 머리카락에 남은 은은한 잔향으로 기억되는 사람, 디퓨저 한 병으로 완성되는 공간—향은 취향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이 된다. 이 철학은 컬렉션의 이름들에서도 드러난다. 도심의 하루를 담은 ‘Silla D’Urbain’ 어반 라이프 향수, 지베르니·빌라란테·플로라처럼 정원을 옮겨 온 가든 컬렉션 디퓨저, 그리고 아브틴·수잔느처럼 시간을 붙드는 타임리스 컬렉션까지.
공주와 왕자가 다시 만나는 선반
가장 시적인 대목은 여기다. 타임리스 디퓨저 컬렉션에는 ‘아브틴(Abtin)’이라는 향이 있다. 천 년 전 신라 공주 프라랑과 혼인한 바로 그 페르시아 왕자의 이름이다. 서사시 속에서 바다를 건너 만났던 두 사람이, 이제 한 브랜드의 진열대 위에서 향과 향으로 다시 나란히 선다. 이름을 향에 새기는 일—그것은 잊힌 이야기를 매일의 공기 속으로 불러들이는 가장 감각적인 방법이다.

아브틴(Abtin) 타임리스 디퓨저 — 실제 향 노트로 읽는 조향 피라미드
그 향의 구조를 들여다보자. 아브틴은 레몬·페어·그린의 맑은 첫인상으로 문을 열고, 프리지아·자스민·로즈·뮤게의 꽃들로 심장을 채운 뒤, 머스크·우디·앰버의 잔향으로 오래 머문다. 시트러스로 날아올라 우드로 가라앉는 이 흐름은, 마치 신라에서 페르시아로 향하던 한 사람의 여정처럼 읽힌다. 첫 향에서 끝 향까지—그것은 천 년을 건너온 이름이 코끝에 머무는 시간이기도 하다.

EPILOGUE · 검색창에서 향까지
이름은 불릴 때 되살아난다
다시 처음의 검색창으로 돌아가자. 2026년의 ‘신라공주’가 리센느 제나라는 사실은, 얼핏 역사가 밈에 밀려난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이렇다. 경주 김씨 성을 가진 한 젊은 아이돌의 별명이 스크롤을 멈춘 누군가를 덕만과 천명과 요석에게로, 나아가 바다를 건넌 프라랑에게로, 끝내는 그 이름을 향으로 되살린 브랜드에게로 데려간다면—그건 잊힌 이름들에 다시 불이 켜지는 순간이다.
검색어는 사라지고 갱신되지만, 이름은 불릴 때 되살아난다. 그리고 향은, 그 이름을 가장 오래 기억하게 하는 언어다. 오늘 우리가 ‘신라공주’를 검색한다면—한 사람만이 아니라, 서라벌의 딸들과 페르시아로 떠난 공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느 공간에 퍼지고 있을 프라랑의 향기까지 함께 떠올려 볼 일이다. 원래 신라공주는, 여러 명이었으니까.
편집자 주 · 근거와 성격
역사 속 공주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설화적 일화와 《화랑세기》 필사본처럼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는 그 성격을 함께 밝혔습니다. 프라랑 공주 이야기는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에 근거한 문학이며 실제 사건과 등치되지 않습니다. 인물의 생몰년·계보에는 학계의 이설이 있습니다. 브랜드 관련 서술은 프라랑(FRARANG)이 공개한 브랜드 스토리와 제품 정보를 참고했습니다.
F R A R A N G M A G A Z I N E
FRARANG MAGAZINE · CULTURE & SCENT
신라공주, 천 년의 이름
검색창의 아이돌에서, 쿠쉬나메의 공주, 그리고 향(香)이 된 프라랑까지
글 · 프라랑 매거진 편집부
PROLOGUE · 검색창에서 시작된 여행
2026년 여름, ‘신라공주’를 검색하면
포털 검색창에 ‘신라공주’를 입력하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건 천 년 전의 서라벌이 아니다. 걸그룹 리센느(RESCENE)의 막내, 제나 다. 경상북도 경주가 고향인 그녀는 최근 고향의 홍보대사로 위촉됐고, 경주시는 “신라공주 야호”를 외쳤다.
처음엔 그저 ‘천년고도 출신 아이돌’에게 붙은 귀여운 별명처럼 보였다. 그런데 제나가 방송에서 자신이 경주 김씨라고 밝히는 순간, 농담은 다른 무게를 갖는다. 경주 김씨는 13대 미추 이사금 이래 신라를 다스린 대표적 왕실 가문. 별명이 혈통을 앞질러 붙은 게 아니라, 혈통이 별명을 뒤늦게 증명한 셈이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다. 수많은 사람이 ‘신라공주’를 검색하지만, 정작 그 이름의 원래 주인들—서라벌에서 실제로 태어나 사랑하고 정치했던 딸들, 그리고 페르시아 서사시 속으로 걸어 들어간 또 한 명의 공주—은 화면 어디에도 잘 뜨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은 일종의 역방향 검색이다. 밈이 데려다준 입구에서, 천 년 전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PART I · 역사가 기록한 신라공주들
공주가 왕이 되던 나라
신라 금관을 모티프로 한 일러스트 — 곡옥(曲玉)과 나뭇가지·사슴뿔 형 세움장식
먼저 짚어둘 것이 있다. 신라의 ‘공주’는 조선의 공주와 다르다. 조선에서 공주가 담장 안쪽에 머무는 봉호였다면, 신라에서 왕의 딸은 대개 그냥 공주라 불렸고, 무엇보다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사를 통틀어 여성 국가원수는 단 네 명. 그중 셋이 신라의 여왕—선덕·진덕·진성—이었다. 공주가 왕이 될 수 있는 나라. 이 한 문장이 서라벌 딸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결로 만든다.
덕만공주 — 최초의 여왕이 된 공주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삼국사기》는 덕만을 진평왕의 맏딸로 기록한다. 아버지는 사위에게 왕위를 넘기는 대신 자신의 핏줄인 딸을 후계자로 점찍었고, 그렇게 덕만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되었다. 향기 없는 모란 그림을 알아본 예언, 그의 치세에 세워졌다 전하는 첨성대, 그리고 비담의 난을 진압하며 다져진 중앙집권의 토대—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발판이 이 시대에 놓였다.
천명공주 — 통일의 씨앗을 낳은 언니
덕만에게는 언니 천명공주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여왕만큼 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흐릿한 이름이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계보의 결정적 마디에 놓여 있다. 천명공주는 김용춘과 혼인해 아들 김춘추—훗날 삼국 통일의 문을 연 태종 무열왕—를 낳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여왕 옆에서, 이름이 덜 불린 언니가 다음 세대를 조용히 세상에 내놓는 방식. 역사는 종종 이렇게 움직인다.
요석공주 — 금기를 넘은 사랑, 그리고 한 학자
가장 이야기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석공주다. 태종 무열왕의 딸이자 문무왕의 누이인 그는 일찍 남편을 잃고 요석궁에 홀로 살았다.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불법을 설파하던 승려 원효가 다리에서 떨어져 젖은 옷을 말리려 요석궁에 들렀다가 그와 인연을 맺는다. 골품제의 금기를 정면으로 거스른 이 사랑에서 태어난 아들이 설총—이두를 정리하고 신라 유학을 대표한 대학자다. 한 번의 사랑이 우리 문자 생활의 한 페이지를 열었다.
선화공주 — 전설이 가장 사랑한, 그러나 뒤집힌 이름
‘신라공주’ 하면 대중의 기억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어쩌면 선화공주일 것이다. 《삼국유사》 속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 국경을 넘어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된 공주. 그런데 이 전설은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봉안기가 절을 세운 왕비를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적으면서 한 번 뒤집혔다. 전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그것은 오히려 다른 질문을 남긴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오래 ‘국경을 넘어 사랑을 택한 신라공주’를 기억하고 싶어 했을까.
PART II · 페르시아 서사시 속 신라공주
또 하나의 신라공주, 프라랑
쿠쉬나메 — 하나의 별 아래, 페르시아와 신라를 잇는 바닷길
그리고 여기, 정사(正史)의 족보에는 없지만 페르시아의 서사시가 기억하는 신라공주가 있다. 이름은 프라랑(Frarang). 11세기 페르시아 시인이 편찬한 대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주인공이다. 800여 쪽 가운데 신라 관련 대목이 500여 쪽에 이르고, 작품 속에서 신라는 ‘바실라(Basila)’—더 좋은 신라—라 불린다.
바실라, ‘더 좋은 신라’라는 뜻이었다
— 쿠쉬나메가 부른 신라의 이름
이야기는 이렇게 흐른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왕자 아비틴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한다. 신라왕 타이후르는 그를 극진히 환대하지만, 딸을 이방인에게 내주기를 망설이며 시험을 낸다—열 명의 처녀 사이에 공주를 숨겨 두고 “찾아보라” 한 것. 아비틴은 공주 프라랑을 알아보고, 우여곡절 끝에 혼인이 성사된다.
주목할 것은 프라랑이 결코 수동적인 공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미지의 땅을 꿈꾸던 여성이었고, 부모와 오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결혼을 택했으며, 남편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러 페르시아로 떠날 때 그 험난한 항해에 함께 올랐다. 이국에서 그는 아들 페리둔을 낳는다. 아비틴은 원수에게 목숨을 잃지만, 신라 공주의 아들 페리둔은 훗날 폭군을 물리치고 페르시아를 구한 구국 영웅이 되어, 어머니의 나라 신라와 대를 이어 인연을 잇는다.
쿠쉬나메, 한눈에
◈ 장르 — 11세기 페르시아 구전 영웅 서사시(문학적 상상). 역사 기록 그 자체는 아니다.
◈ 발굴 — 이희수 교수 등이 2009~2010년 국내에 소개, 영국국립도서관 소장 필사본을 확보해 국제 공동 연구.
◈ 인물 대응설 — 왕자 아비틴은 당으로 망명한 사산조 왕자 피루즈(페로즈)와, 신라왕 타이후르는 무열왕·문무왕 시대와 곧잘 견주어진다.
◈ 교류의 흔적 — 천마총 유리잔, 황남대총 은잔의 여신 아나히타 등 신라 속 페르시아의 자취는 실제로 존재한다.
물론 쿠쉬나메는 ‘아랍에 대한 페르시아의 복수’로 끝나는 대체역사풍 문학이다. 프라랑과 아비틴의 혼인을 곧장 실제 사건으로 등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슬람권이 신라를 ‘황금의 섬’으로 그리며 오래 상상했다는 사실, 그 상상의 한복판에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신라공주가 놓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프라랑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신라’의 얼굴이다.
INTERLUDE · 천 년을 넘나드는 가마
이름을 태운 가마
천 년을 건너는 방 — 신라 공주의 가마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그리다
한 채의 가마를 상상한다. 붉은 휘장을 드리운 작은 방, 그 안에 서라벌의 공주가 앉는다. 가마꾼의 발끝이 땅을 밀 때마다 방은 조용히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공주는 왕궁을 떠나 새로운 이야기 쪽으로 실려 간다. 요석궁의 젊은 과부에게도, 바다 건너 페르시아로 향하던 프라랑에게도, 삶의 결정적 순간에는 늘 한 채의 가마가 있었다.
가마는 시간을 건너는 방이다
— 서라벌에서 오늘까지
그리고 그 가마는 멈추지 않았다. 천 년의 길을 건너, 오늘 그것은 더 이상 나무와 비단이 아니라 한 병의 향으로 움직인다. 뚜껑을 열면—레몬의 첫 향에서 우드의 잔향까지—가마의 문이 열리듯 이름 하나가 걸어 나온다. 프라랑. 서라벌에서 출발한 그 가마는, 지금 당신의 공간에 도착해 있다.
PART III · 향(香)으로 돌아온 이름
향을 입는 공주, 브랜드 ‘프라랑’
곡옥을 엠블럼으로 품은 향(香)의 오브제
그렇게 잊혀 가던 이름이, 21세기에 향(香)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의 향 솔루션 브랜드 프라랑(FRARANG)은 바로 그 바실라의 공주 프라랑에게서 이름을 빌려 왔다. 탈취성분과 감각적인 복합향기를 결합해, 디퓨저와 향수를 통해 공간과 일상을 향으로 다시 짓는 브랜드다.
브랜드가 스스로 말하는 세계관은 이렇게 요약된다. 과거 신라 왕족이 향으로 자신을 표현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향수로 ‘나’라는 존재를 완성한다는 것.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지던 이국의 향료, 왕족의 공간을 채웠던 짙은 우드, 그리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프레시한 톤—이 셋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이상적인 향이 태어난다는 질문에서 프라랑은 출발했다.
“우리는 향을 입는다”
— 프라랑이 향을 정의하는 방식
그들에게 향은 액세서리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이자 정체성이다. 머리카락에 남은 은은한 잔향으로 기억되는 사람, 디퓨저 한 병으로 완성되는 공간—향은 취향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이 된다. 이 철학은 컬렉션의 이름들에서도 드러난다. 도심의 하루를 담은 ‘Silla D’Urbain’ 어반 라이프 향수, 지베르니·빌라란테·플로라처럼 정원을 옮겨 온 가든 컬렉션 디퓨저, 그리고 아브틴·수잔느처럼 시간을 붙드는 타임리스 컬렉션까지.
공주와 왕자가 다시 만나는 선반
가장 시적인 대목은 여기다. 타임리스 디퓨저 컬렉션에는 ‘아브틴(Abtin)’이라는 향이 있다. 천 년 전 신라 공주 프라랑과 혼인한 바로 그 페르시아 왕자의 이름이다. 서사시 속에서 바다를 건너 만났던 두 사람이, 이제 한 브랜드의 진열대 위에서 향과 향으로 다시 나란히 선다. 이름을 향에 새기는 일—그것은 잊힌 이야기를 매일의 공기 속으로 불러들이는 가장 감각적인 방법이다.
아브틴(Abtin) 타임리스 디퓨저 — 실제 향 노트로 읽는 조향 피라미드
그 향의 구조를 들여다보자. 아브틴은 레몬·페어·그린의 맑은 첫인상으로 문을 열고, 프리지아·자스민·로즈·뮤게의 꽃들로 심장을 채운 뒤, 머스크·우디·앰버의 잔향으로 오래 머문다. 시트러스로 날아올라 우드로 가라앉는 이 흐름은, 마치 신라에서 페르시아로 향하던 한 사람의 여정처럼 읽힌다. 첫 향에서 끝 향까지—그것은 천 년을 건너온 이름이 코끝에 머무는 시간이기도 하다.
EPILOGUE · 검색창에서 향까지
이름은 불릴 때 되살아난다
다시 처음의 검색창으로 돌아가자. 2026년의 ‘신라공주’가 리센느 제나라는 사실은, 얼핏 역사가 밈에 밀려난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이렇다. 경주 김씨 성을 가진 한 젊은 아이돌의 별명이 스크롤을 멈춘 누군가를 덕만과 천명과 요석에게로, 나아가 바다를 건넌 프라랑에게로, 끝내는 그 이름을 향으로 되살린 브랜드에게로 데려간다면—그건 잊힌 이름들에 다시 불이 켜지는 순간이다.
검색어는 사라지고 갱신되지만, 이름은 불릴 때 되살아난다. 그리고 향은, 그 이름을 가장 오래 기억하게 하는 언어다. 오늘 우리가 ‘신라공주’를 검색한다면—한 사람만이 아니라, 서라벌의 딸들과 페르시아로 떠난 공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느 공간에 퍼지고 있을 프라랑의 향기까지 함께 떠올려 볼 일이다. 원래 신라공주는, 여러 명이었으니까.
편집자 주 · 근거와 성격
역사 속 공주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정사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설화적 일화와 《화랑세기》 필사본처럼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는 그 성격을 함께 밝혔습니다. 프라랑 공주 이야기는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에 근거한 문학이며 실제 사건과 등치되지 않습니다. 인물의 생몰년·계보에는 학계의 이설이 있습니다. 브랜드 관련 서술은 프라랑(FRARANG)이 공개한 브랜드 스토리와 제품 정보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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